Ⅰ.
이 책은 2009년도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과제인 <9세기~13세기 한족과 북방민족 관계사 연구동향>의 연구결과물이다. 연구의 범위는 9세기 이래 13세기로서, 중국 왕조로 치자면 당(唐) 후반기로부터 송(宋)과 요(遼)·금(金), 그리고 몽골제국 초기에 이르는 시기이다. 대략 송조의 성립과 멸망을 전후한 시대 한족과 북방민족 사이에 관계사가 어떻게 연구되어 왔는가를 고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당 왕조의 후반으로부터 송대의 시기를 통해 중국사회에는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이를 중국사학계에서는 ‘당송변혁’이라 부르거니와, 그 변화의 내용은 정치와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있었다. 중국의 대외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 후반기 이래 북방민족의 활동은 이전과 전연 다른 양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수당시대의 돌궐과 위구르와 비교하여 오대, 송 이후의 거란이나 금, 서하 등은 판연히 다른 존재였다. 이들은 국가의 구조는 물론이려니와 민족적 자각, 중국에 대한 태도 등에서도 전연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 책은 이렇듯 당송변혁기에 들어 판이한 형태를 띠는 한족과 북방민족 사이의 관계사, 그리고 그것에 대한 연구가 어떠한 동향을 보이는가 하는 점을 살펴본 결과물들이다. 다만 검토의 대상은 중국 대륙의 연구만으로 한정시켰다. 이는 무엇보다 연구자들의 역량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연구과제의 기획 자체 중국 대륙학계의 대외관계사 연구동향을 점검한다는 지향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학계의 대외관계사 연구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고 거기에 어떠한 방향이 감지되는가, 그리고 나아가 그러한 연구 동향에 중국 당국의 정책적 판단이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점을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중국의 대외관계사 연구, 특히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 지역의 연구를 정확히 인식하고, 이에 기반하여 경쟁력 있는 한국사 연구의 체계를 수립하는데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역사학은 단순한 학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난 역사에 대한 건강한 인식이야말로 그 자체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관용을 지닐 수 있게 하는 원천이 된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현대의 무한 경쟁 시대에서, 역사는 국가의 귀중한 자산이자 역량이 되기도 한다.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든가 일본의 독도 영주권 주장 등을 통해 생생히 체험한 바와 같다.
Ⅱ.
이 책에서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주제는, (1) 당대 후반기의 한족과 북방민족 관계사, (2) 오대 왕조와 거란의 관계사 연구, (3) 북송과 요 사이의 관계사 연구 동향, (4) 서하사 연구 동향, (5) 송금 관계사 연구 동향, (6) 남송-몽골 관계사 연구의 여섯 가지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주제를 제외하면 모두 송조와 북방민족 국가 사이의 대외관계사이다. 각각의 주제와 관련한 연구의 동향은 해당 논문에서 소상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중복을 피하여 중국 학계의 송대사 연구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 간략히 언급해 두기로 한다.
중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송대사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었다. 고대사나 근대사 등의 여타 시대사연구가 이미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시작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뒤늦은 것이었다. 그 첫 세대 연구자들이 바로 오늘날 중국 송대사 연구의 기초를 다진 멍원퉁(蒙文通), 장인린(張蔭麟), 첸러쑤(陳樂素), 덩광밍(鄧光銘) 등이었다. 이들은 1930년대 중반 이래 1940년대 초반에 걸쳐 베이징(北京) 대학 등지에서 송사(宋史) 강좌를 개설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들 중에서도 덩광밍(1907~1998)은 멍원퉁에게 수학한 제자로서 사실상 송대사 연구에 제1세대의 연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1930년대에 본격적인 송사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그의 연구는 중국 학계의 송대사 연구를 선도하고 또 대표하는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업적은 비단 송대사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제자 양성을 통해서도 송대사 연구의 발전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훈도를 거쳐 배출된 제자들, 예컨대 치샤(漆俠)와 왕청위(王曾瑜), 장시칭(張希淸), 덩샤오난(鄧小南) 등은 오늘날 중국 송대사 학계를 대표하는 연구자들로 활동하고 있다.
멍원퉁, 장인린, 첸러쑤, 덩광밍 등의 연구와 강의는 중국의 각지에 송대사 연구의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하였다. 멍원퉁의 영향으로 베이징대학과 쓰촨대학에, 장인린과 첸러쑤의 영향으로 저쟝대학(예전의 杭州大學)에, 그리고 덩광밍의 영향으로 베이징대학에 송사연구의 전통이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 토대가 닦인 북경대학, 절강대학, 사천대학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국에서 송대사 연구를 대표하는 중점 기지들로 기능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의 송대사 연구는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문화대혁명과 함께 된서리를 맞았다. 순수한 학문연구는 타기되고, 역사학은 현실 정치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해야 한다는 영사사학(影射史學)만이 판을 쳤다. 이 기간에 발표된 역사학 논문들은 모두 유법투쟁(儒法鬪爭)이라든가 농민기의, 인물평가 등과 관련된 것들 뿐이었다. 그것들마저도 철저히 문화대혁명의 계급투쟁에 기여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1971년 린뱌오(林彪)가 사망한 후에는 이른바 ‘비림비공(批林批孔)’ 및 ‘수호전(水滸傳) 비판’이 역사학의 대세를 점하였다.
1960년대 이래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 시기는 비단 역사학 뿐만 아니라 학문 전체에도 커다란 암흑기였다. 이 기간 역사학자들은 붓을 꺾고 침묵해야 했다. 모든 역사학자들의 연구경력에서 이 시기의 논문발표 실적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황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학문의 암흑기에도 개별 학자들의 연구와 절차탁마는 지속되었다. 오늘날 중국의 송대사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왕청위(王曾瑜)가 이 험난한 시기에 <송회요집고>의 정독에 매진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되고 ‘영사사학(影射史學)’이 아닌 자유로운 학문연구의 기풍이 보장되자, 원로학자들을 중심으로 곧바로 중량감 있는 송대사 연구의 논저가 발표되기 시작하였던 것도 그러한 차분한 절차탁마의 지속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1977년 중공 당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종료 선언은 송대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송대사 학계는 재앙과도 같았던 문화대혁명 시기의 상처를 딛고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남긴 후유증은 컸다. 1980년대 초에 이르도록 송대사 학계는 그 영향으로 (1) 송강(宋江) 문제, (2) 악비(岳飛) 문제, (3) 농민기의, (4) 왕안석(王安石) 변법 등의 주제에 매달려 있었다. 농민기의는 물론이거니와, 송강이 과연 투항파였는가, 악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등의 주제도 문화대혁명 시기의 영향을 청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왕안석 변법과 관련된 연구 역시, 문화대혁명 시기 왕안석을 법가(法家)의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하던 것을 반성하고 재평가하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연구와 문화대혁명 시기의 반성을 거치면서 중국의 송대사학계는 신속하게 재정비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이후가 되면 송대사 연구자 전체를 아우르고 상호간 교류와 소통을 위한 학회가 창립되었으며, 학문후속세대의 양성을 위한 연구기지의 재건도 본격화하였다.
오늘날 송대사학계를 대표하는 연구단체는 중국송사연구회(中國宋史硏究會)이다. 중국의 송사연구회는 1980년 덩광밍(鄧廣銘)의 주도로 상하이에서 결성되어 첫 번째 연회(年會)를 개최하였다. 제1차 연회에서 발표되었던 논문들은 <송사연구논문집(宋史硏究論文集)>(上海古籍出版社, 1982)이란 명칭으로 묶여져 발표되었다. 이후 송사연구회는 대략 2년만에 한 차례 씩 연회를 개최하고 그 결과물들을 묶어 <송사연구논문집>이란 이름으로 발간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송사연구회의 연회는 2008년까지 13차례의 연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중국의 송사연구 기지 가운데 가장 먼저 설립된 것은 베이징대학의 고대사연구중심(古代史硏究中心)이다. 1980년 송사연구회의 창립과 함께 그 회장으로 추대되었던 덩광밍이 개설한 연구기지였다. 그 뒤를 이어 등광명의 첫 번째 제자인 치샤(漆俠)에 의해 설립된 허베이(河北)대학의 역사연구소(오늘날의 宋史硏究中心), 장인린(張蔭麟) 및 첸러쑤(陳樂素)의 제자인 쉬구이(徐規)에 의해 설립된 항저우(抗州) 대학(오늘날의 浙江大學)의 송사연구실(후에 南宋史硏究中心으로 발전), 멍원퉁(蒙文通)의 제자인 후쟈오시(胡昭曦)에 의해 설립된 쓰촨(四川) 대학의 송사연구실, 역시 멍원퉁의 제자인 주루이시(朱瑞熙)에 의해 설립된 상하이사범대학의 송사연구실, 허베이대학 역사연구소 출신의 학자들이 설립한 허난(河南)대학 역사연구소, 그리고 장인린의 제자인 리옌(李埏)에 의해 설립된 윈난(雲南)대학의 봉건경제사연구실(封建經濟史硏究室) 등이 속속 연구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연구기지는 현재까지도 중국내 송사 연구의 중심처이자 주요 송사연구자를 배출하는 요람의 역할을 하고 있다.
Ⅲ.
1950년대 이래 2000년 이후의 오늘날에 이르는 중국학계의 송대사 연구 동향을 살필 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가 유물사관의 퇴색과 이른바 ‘애국주의’ 경향의 증대라 할 수 있다. 그런 애국주의 조류가 여타 관점을 압도해가는 흐름은 본서에 살펴본 한족과 북방민족 관계사 연구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2010년대에 들어선 오늘날, 애국주의 사관은 여타의 관점을 압도하는 지고의 가치로 인식되고 있다. ‘중화민족론’, ‘다원일체론’, ‘통일적다민족국가론’ 등으로 불리는 새로운 중국사 인식은, 전통적인 중국사의 인식체계를 송두리 채 뒤흔들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애국주의는 이제 1950년대 이래의 유물사관이 누리던 지위를 대체하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횡행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현대 중국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오늘날 중국 당국이 가장 부심하고 있는 정책적 과제 가운데 하나가 소수민족 문제이다. 현재 중국은 공식적으로 55개 소수민족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 대부분은 중국 중앙정부의 통치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티베트 족이라든가 위구르 족처럼 한족에 대해 커다란 적개심을 지니고 있는 민족도 있다. 이러한 이질적 민족들을 다독거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 아래 안주시키는 것이야 말로, 중국의 통치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중국 교육당국에서는 중국역사의 주체가 한족이 아니라 중화민족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 역시 한족이 중심을 이루는 국가가 아니라 ‘통일적다민족국가’라고 한다. 한족만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소수 민족이 어우러져 중국이라는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여진족이나 거란족, 몽골족, 위구르족, 티베트족, 그리고 심지어 조선족까지 중화민족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라는 시각이 아직 중국학계에 완전히 정착한 것 같지는 않다. 본서의 여기저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중국의 송사연구자들은 전반적으로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대전제를 수용하면서도 연구의 세부 분야에 들어가면 구래의 한족 중심적 민족주의를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입장의 고수는 특히 원로에 속하는 학자일수록 더욱 강하다.
중국 당국의 지향과 중국인, 특히 한족 원로 학자의 민족적 정서 상이의 상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주제의 하나가 알비(岳飛)의 평가 문제이다. 중국이 통일적다민족국가라는 관점에 입각한다면, 북송과 남송뿐만 아니라 요와 금 등도 중국을 구성하는 정권의 하나가 된다. 동일한 논리에서 송과 금 사이의 전쟁도 중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일어난 내전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악비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남송과 금의 전쟁이 내전이라면, 더 이상 전통적인 관점에 따라 악비를 ‘민족의 영웅’이라든가 혹은 ‘구국의 영웅’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대략 199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 학계의 악비에 대한 평가는 전통적인 입장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악비와 진회의 대립구도를 ‘민족영웅’과 ‘매국노’라 이해하였다. 하지만 중국 당국의 민족정책이 강화되고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 대세를 이루어가면서 악비에 대한 평가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정책 당국의 입장에 따르는 견해가 점차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악비 평가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악비연구(岳飛硏究)>라는 부정기 간행물이다. 이 간행물은 악비의 사당이 있는 항저우에서 발간된다. 1988년 1집이 나온 이래 지금까지 5집이 발간되었는데, 1996년에 간행된 4집까지만 해도 악비를 민족 영웅이라 인식하는 논문이 절대 다수였다. 그런데 중국 당국의 민족정책이 강화되며, <악비연구>는 거의 10년만에 5집이 가까스로 발행되었다. 그리고 5집에 수록된 논문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악비와 무관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사실상 <악비연구>가 아니라 <송대사연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악비라는 인물이 지닌 정치적 민감성,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악비에 대한 관심의 저하 등이 반영된 산물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학문 조류의 변화, 즉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의거한 악비 재평가의 흐름속에서도 왕청위(王曾瑜)나 리시호우(李錫厚) 등과 같은 원로학자들은 여전히 악비를 민족영웅으로 서슴없이 규정하고 있다. 특히 왕청위의 경우, 2002년도에 출간한 저서 (<岳飛和南宋前期政治與軍事硏究>,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2002, 4쪽)에서도 악비와 진회를 선명하게 선과 악의 대립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국가에는 역사가 없으면 안 된다. 특히 중국과 같이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나라에 있어 역사상에는 영광과 치욕이 병존하며 정의와 사악함이 서로 투쟁하였다. 우리는 진보와 퇴보가 모두 존재했던 역사를 공부하며 교훈을 얻어 민족 진보의 영양소로 삼아야 한다. 남송초의 시기에 있어 이강(李綱)과 종택(宗澤)·악비가 한 편이었고, 송의 고종과 황잠선(黃潛善)·왕백언(汪伯彦)·진회 등이 다른 한 편이었다. 이는 전형적인 영광과 치욕, 정의와 사악함, 진보와 퇴보의 투쟁이었다.
왕청위는 오늘날 중국의 송대사학계를 대표하는 원로 학자이다. 그는 덩광밍과 치샤의 뒤를 이어 중국송사연구회의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그에게 있어 악비에 대한 평가는 중국 당국이 부심하고 있는 민족정책과는 범주가 다른 문제라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동료이자 요사(遼史) 연구의 원로인 리시호우는 심지어, ‘현재적 관점에 구애되어 역사상의 시비를 재론해야 한다면 그것은 역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岳飛與紹興和議」, <宋史硏究通訊> 42, 2003) 라고까지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중국 당국은 현재 정책적으로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전파하고 있고 그것의 강조가 시간이 흐르며 더욱 강화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중국학계에서 감지되는 역사 인식체계상의 혼돈도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 추정된다. 본서에서는 연구물 숫자의 제약으로 그 필자의 연령 분포와 논저의 성격을 대비하는 작업은 진행시키지 못했다. 만일 그러한 작업이 가능한 주제와 분야라면, 분명 연구자의 연령 구성 및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용해 정도가 상호 대응하는 면모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족 및 북방민족 왕조사이의 접촉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중국에서 극히 중요한 현재적 의미를 내포하는 주제이다. 1980년대 이래 중국에서는 개혁 개방 정책의 추진과 더불어 중화민족 일체론의 관점에 의거한 중국내 각민족의 통합내지 융합이 절실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현재적 필요성이 한족과 북방민족 관계사의 연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그 접촉 및 교류의 역사에 대한 이해의 시각을 전면적으로 굴절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근명 외, 동북아역사재단, 2010년 12월, 356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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