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를 통해 대화가 동기창(1556~1636)의 명성은 전중국에 떨쳤다. 살아 생전에는 화단의 영수로서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사후에는 위로 황제로부터 아래로 사대부와 상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을 소장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겼다. 중국 미술사에 있어 그의 위상은 확고하다. 예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이론가로서도 그는 불후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동기창의 자화상
그는 남중국의 대도시 송강(松江)에서 살았다. 송강은 15세기 이래 면직물업의 중심지로서, 인근에 있는 소주(蘇州)와 함께 중국의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송강에 있는 그의 저택에는 그의 작품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 정황에 대해 전겸익(錢謙益, 1582~1664)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권세가들이 정중히 작품을 청하여도 동기창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시켜 그리게 하였다. 때로는 노비들이 가짜 그림을 갖고 와서 부탁해도 흔쾌히 거기에 자기의 서명을 해 주었다. 집안에는 처첩이 많았는데, 진품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들 여인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태연히 대작을 시키는 예술가, 심지어 남이 가져 온 가짜 그림에도 서슴없이 자신의 서명을 적어주는 화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예술 세계를 동경하며 ‘예술가의 양심’을 대단한 가치로 여긴다. 지고의 미와 선을 추구하는 예술가라면, 그에게 특별한 도덕성과 인격이 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아름다운 미의 세계를 이뤄낸 최고의 화가일수록, 그 예술 세계만큼이나 그의 인격도 고귀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17세기 최고의 화가라 일컬어졌던 동기창에게는 미술 내지 예술 세계에 대한 헌신이나 경건함이 전연 존재하지 않았다. 미술의 가치를 지킨다는 의식도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은 고사하고, 저자거리의 장사치도 지니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상도덕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가짜를 진품이라 속이고 판매하며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상인이 동기창의 서예 작품을 사고 싶어 했다. 하지만 동기창의 작품에 가짜가 많다는 얘기를 너무도 많이 들었던지라, 애써 구한 것이 혹시나 진품이 아니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그 상인은 동기창과 매우 가깝다는 사람에게 다리를 놓아 상담하였다. 그 사람의 소개로 많은 돈을 주고서야 겨우 동기창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동기창은 그 상인의 면전에서 직접 글씨를 써서 건네주었다. 상인은 그 작품을 응접실에 걸어두고 사람들에게 자랑하였다. 보는 사람마다, ‘과연 진품은 다르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였다.
이듬해 그 상인은 동기창이 사는 송강에 다시 가게 되었다. 그가 동기창이 사는 동네 인근을 지나고 있을 때 마침 가마 탄 사람이 지나갔다. 그때 누군가, ‘동기창이다!’ 라고 외쳤다. 상인은 가마 탄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전에 글씨를 써준 노인과는 전연 다른 사람이었다. 상인은 속은 것을 알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였다. 그것을 보고 동기창이 무슨 일인지 물었다. 동기창은 딱하다 여겨서 서예 작품을 하나 써 주었다. 상인은 마침내 진품을 손에 넣었다고 자랑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전 작품의 품격이 훨씬 낫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명대 강남지방 도시의 번화한 모습
16 세기 남국에서는 상업 발달과 함께 도시화가 진척되어 쑤저우, 송강, 난징 등이
수십만의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이쯤 되면 동기창이란 인물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예술의 가치고 뭐고 돌아보지 않는 파렴치한 사람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보호한다는 인식도 없었다. 밀려오는 사람들에게 온갖 방법으로 덤터기 씌워 돈을 버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여 그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던 것일까? 놀라지 마시라. 그가 미술품을 팔아 일군 재산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송강 시내에 있는 그의 화려한 저택은 수백 칸이 넘었으며, 이밖에 선박 100여척에 농토 1만경(頃)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1만경이라 하면 무려 1억 7천만 평에 해당한다. 10만평도 아니고 100만평도 아니고, 1억 7천만평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1억 7천만평이라 하면 도대체간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당시 중국 어디나 동기창 작품의 모사품이 넘쳐났다. 동기창은 출세하기 전 일찍이 평호(平湖)의 풍씨 집안에서 가정교사로 지낸 적이 있었다. 그가 유명해진 다음 풍씨는 6개의 부채를 갖고 와서, 낙관을 감추고 동기창에게 자기 작품을 골라 보라고 하였다. 동기창은 잠시 후 3개를 지목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모두 다른 사람의 서예 작품이었다고 한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동기창은 과거에 합격할 때의 시험관이었던 고관에게 감사의 표시로 많은 작품을 그려주었다. 그 고관이 어느 날 동기창을 불러 작품들에 대한 품평을 부탁하였다. 동기창은 심사숙고한 다음 어느 작품을 골랐다. 그리고 말하였다.
“이것은 제 평생 최고의 작품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도저히 이러한 필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에 그 고관이 한숨을 쉬며 대답하였다.
“이것은 그대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베껴 그리게 한 것이라오.”
당시 시중에는 동기창 본인조차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정도로 수준 높은 위작이 많았던 것이다. 또 동기창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의 필치를 모델로 삼아 서화를 그리는 작가들도 대단히 많아졌다. 이러한 현상은 동기창의 생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동기창의 명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졌다. 특히 청대의 강희제는 그의 예술에 대한 신봉자였다. 그리하여 17세기를 거쳐 18세기에 이르도록 동기창 작품의 가격은 높아져만 갔고, 이에 비례하여 위작의 풍조 역시 식을 줄 몰랐다.
동기창의 초기 그림(구봉초은, 九峰招隱, 상하이 박물관 소장)
북송 시대 화풍의 영향을 받아 실경을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위작의 범람에 대해 동기창에게 그 책임을 모두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 전문 대역 화가를 고용하여 위작을 시키고도 양심의 가책을 전연 느끼지 않았다. 유독 동기창의 작품에만 위작이 많았던 데는 이러한 작가 자신의 부도덕함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작가 본인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진위의 구별이 모호해지게 되면서, 위작의 풍조는 더욱 기승을 떨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Ⅱ.
그런데 동기창의 부도덕성은 비단 위작의 범위에만 그치지 않는다. 예술 세계에서 벗어나 일상 생활에 이르면 그는 실로 인격 파탄자, 흉악한 범죄자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주 곤란한 인물이었다. 그는 송강에 거주하며 사소한 시비를 걸어 약자들의 재산을 강탈하였다. 또 주민들이 약간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노비를 풀어 폭행하기를 예사로 하였다. 나아가 추악하게도 나이들도록 여색의 탐닉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주변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동기창의 흉악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1616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61세 되던 해에 발생하였던 송강 시민의 폭동이다. 당시 송강시에 육소방(陸紹芳)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가 거느린 어느 소작농 집안에 녹영(綠英)이란 딸이 있었다. 당시 녹영은 나이 15세였는데 아리따운 미모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경성지색(傾城之色), 즉 도시 하나를 혼란에 빠트릴 만한 미인이라 일컬었다. 이 소문은 61세의 동기창 귀에까지 들어갔다. 동기창은 둘째 아들 동조상(董祖常)을 시켜 그녀를 데려오게 하였다. 동조상은 어느 날 밤 200명의 무뢰배를 데리고 육소방 집안에 쳐들어가서 녹영을 보쌈해 왔다. 동기창은 녹영을 자신의 첩으로 삼아버렸다.
그러자 육소방은 화가 나서 송강 시내 곳곳에 동기창의 악행을 고발하는 벽보를 붙였다. 이에 놀란 동기창은 사람을 중간에 넣어 육소방과 화해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이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의외의 변수가 발생하여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누군가 평소 동기창의 소행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사람이 이 사건을 소설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 동기창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몰염치하기 짝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더욱이 소설 내용은 노래로도 만들어져 삽시간에 송강 시내에 두루 퍼졌다. 이 소식을 듣고 동기창은 불 같이 화가 났다. 그는 소설을 쓴 사람이 누굴까 수소문하였다. 그리고 인근에 사는 범창(范昶)이란 서생을 지목하고 그를 데려다 취조하였다. 범창은 한사코 그런 일이 없다고 부정하였지만 동기창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돌연 범창이 급사하고 말았다.
범창의 노모와 미망인은 동기창의 집 앞으로 와서 동기창 때문에 범창이 죽었다며 크게 소란을 피웠다. 이를 본 동기창의 둘째 아들 동조상은 두 여인을 집안으로 끌고 와 무참히 폭행하였다. 후에 동조상은 이 일로 재판을 받았다. 그 고소장에는 ‘도음(搗陰)’, 즉 음부를 짓이겼다는 내용이 있다. 다른 기록에는, ‘머리털이 다 뽑혔으며 양 다리 사이에서는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고 적혀 있다. 실로 여성에게 최고의 모욕을 주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송강 시내 전체의 민심이 흉흉해졌다. 격분한 시민들은 동기창의 집 앞으로 몰려들었다. 송강 시민들 사이에서는, ‘따뜻하고 배부르게 살기 원하거든 먼저 동기창을 죽여라(欲要柴米强 先殺董其昌)’란 말이 나돌았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동조상은 지붕 위에 올라가 군중들을 항해 기왓장을 던지고 분뇨를 뿌려댔다. 이러한 동조상의 소행은 불 위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마침내 군중은 폭발하여 동기창의 저택에 불을 질렀다. 호화로운 동기창의 집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동기창이 수십년 간 공을 들여 수집한 골동품과 서화도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동기창은 담장을 넘어 가까스로 화를 피했다. 그는 이후 소주와 진강(鎭江) 등지로 떠돌다 반 년이 지나 사태가 완전히 가라앉은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러한 무도하고 비열한 위인이 관직 생활이라 하여 곱게 수행하였을 리 만무하다. 그는 49세 되던 해인 1604년, 호광제학부사(湖廣提學副使)에 임명되었다. 학교 및 교육 상황을 감독하고 점검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는 부임 이후 직무는 수행하지 않고 학교와 학생에 대한 감독을 핑계로 유람을 일삼았다. 제학부사의 담당 업무 가운데 하나는 생원, 즉 학교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시험을 치는 것이었다. 시험이 있던 어느 날, 그가 시험장에 입장하자 학생들이 모두 기립하였다. 이에 그는, ‘여러 학생들은 모두 앉으라’ 고 말한 다음 그대로 퇴장해 버렸다. 제학부사는 시험을 치루는 학생들에게 작문의 주제를 제시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대로 나가버리자 학생들 사이에 소동이 일었다. 제학부사의 휘하 관원들이 화급히 동기창을 찾아가, 작문의 주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 말하지 않았더냐?”
결국 ‘여러 학생들은 모두 앉으라(童生坐生員皆坐)’ 고 했던 말이 작문의 주제였던 것이다.
또 한 번은 시험이 있기 전날, 그는 자기 집무실 앞에 ‘내일은 시험이 없다(明日不考文)’는 내용의 공고문을 내붙였다. 이튿날이 되어 생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험장에 모였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누군가 동기창에게 찾아갔다. 시험은 어떻게 되며, 작문의 주제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동기창은 또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무슨 말이냐? 오늘은 본디 시험이 있는 날이 아니더냐? 작문의 주제는 어제 공고한 그대로이다.”
이때 시험의 작문 주제는 전날 내붙였던 공고문, 즉 ‘내일은 시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기창의 처사를 두고 유머라든가, 혹은 구속을 벗어던지는 자유나 낭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학생과 시험에 대한 조롱이요 모욕이라 해야 될 것이다. 학생들은 이러한 동기창의 우롱에 견디다 못해 집단 행동을 일으켰다. 동기창의 집무실은 화가 난 학생들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는 불상사를 야기한 책임을 지고 부임 1년 만에 호광제학부사직에서 불명예 퇴직하였다.
이처럼 약자인 학생들 위에 멋대로 군림하던 그는 강자들 앞에서는 대단히 상냥하였다. 1620년, 그러니까 동기창으로 말미암은 송강 시민의 폭동이 있고난 지 4년 후의 일이다. 이때 신황제가 즉위하자 그는 태상시소경(太常寺少卿)에 임명되어 북경으로 갔다. 당시는 환관 위충현(魏忠賢, 1568~1627)이 절대적인 권세를 부리고 있었다. 위충현의 위세가 어찌나 대단하였던지, 신하들은 그의 앞에서 ‘구천세(九千歲’)를 외쳤다고 한다. 황제에게 ‘만세’라고 하는 것을 사실상 그대로 따라 한 셈이다. 또 민간에서는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되어 생전에 그를 모시는 사당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북경으로 간 동기창은 환관 위충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다. 위충현은 그 무렵 매일 사람들을 불러 연회를 베푸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동기창은 위충현의 연회석을 빛내기 위해 기둥과 벽면마다 자신이 그린 서화를 걸어두었다. 이에 위충현은 크게 기뻐하였고, 동기창은 그것에 감복하여 더욱 힘을 내어 연회석 치장에 노력하였다고 한다. 당시 동기창은 65세, 위충현은 53세였다.
동기창 장년 시절의 대표작(완련초당도, 婉孌草堂圖, 개인 소장)
43세 되던 해에 그린 작품으로서, 당대 왕유의 화법을 재해석하는 개성적 화풍이
잘 드러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금 세월이 흐른 뒤인 1625년, 이번에는 위충현에 반대하던 동림당(東林黨)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때 동기창은 70세의 고령으로 남경의 예부상서에 임명되었다. 그는 다시 동림당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선사하며 접근하였다고 한다. 관료 동기창은 가위 무절조, 후안무치라 하여 전연 지나침이 없는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Ⅲ.
여기까지 알고 나면 동기창에 대해, ‘뭐 이런 파렴치하고 야비한 인간이 다 있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못된 사람은 없다. 동기창 역시 처음부터 그처럼 무도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젊은 시절의 그는 진지하고 패기가 넘칠 뿐더러 매우 따뜻한 성품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후일 그는 명필가이자 화단 최고의 권위자로서 이름을 날리지만, 10대 중반까지만 해도 필치가 아주 졸렬하였다. 16세 되던 해 그는 과거 시험의 첫 단계라 할 수 있는 송강부학(松江府學)에 응시하였다. 답안지의 내용만으로는 1등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필체가 나쁘다는 이유로 2등으로 강등되었다. 이 일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서예에 정진하여 옛 사람들의 경지, 특히 위진(魏晉) 시대 고인(古人)의 기품을 체득했다고 한다.
24세 되던 해인 1579년 그는 남경으로 가서 향시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때 서성(書聖)이라 추앙되는 왕희지(王羲之)의 서예 작품집을 접하고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그는 또다시 3년 동안 전력을 기울여 서예를 연마하였다. 이 기간 동안 서예의 경지가 한 단계 도약하고 감식안도 현격히 높아졌다.
동기창의 서예 작품
동기창은 특히 행서에 능하였는데, 부드러움 속에 강건함과 준수함,
변화무쌍함이 두루 담겨 있다고 일컬어졌다.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아무리 서화에 개안하게 되었다 해도 가정은 여전히 빈한하였다. 30세 무렵 그는 송강 인근의 도시 평호(平湖)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때 어느 부호의 자제가 갑작스레 곤궁해져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옛 서화 작품을 내다 팔고자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동기창은 가정교사의 월급을 털어 모두 주고 나서 빈털터리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부인에게 크게 핀잔을 받았다고 한다. 가난한 시절의 동기창은 따뜻한 인간애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33세 되던 해인 1588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것도 전체 합격자 350명 가운데 4등이라는 대단히 우수한 성적이었다. 동기창에게는 황실의 도서관에 해당하는 한림원의 관직이 주어졌다. 이후에도 한동안 그의 성실한 생활은 이어졌다. 한림원에 근무하면서 그는 서화에 절차탁마하였다. 그리고 그가 지니고 있는 서화에 대한 안목은 주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를 두고 ‘당대 최고의 감식안을 지녔다.’ 라는 평판까지 돌았다.
이 무렵 한림원에 같이 근무하던 선배 관료 하나가 병으로 퇴직하였다. 하지만 그 선배 관료는 너무도 청렴하여 고향인 복건(福建)까지 갈 노자도 없는 상태였다. 이에 동기창은 휴가를 내고 그를 도와 머나먼 복건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그와 관련한 미담은 이 시기까지로 멎는다. 이후 그는 고관으로 승진을 거듭하고 화단에서의 명망도 급속히 높아졌다. 이와 더불어 평범하였던, 아니 오히려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던 그는 점차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마침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사나운 성품의 소유자가 되어버렸다.
동기창의 인격은 그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면서부터 파탄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빈한한 시절 서화에 매진하고 주변 사람들에 대해 따뜻하게 배려하며 생활하였다. 하지만 고관대작이 되고 화단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며 그는 세상 위에 제멋대로 군림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누구나 권세를 잡고 싶어 한다. 또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현자들이 다 같이 지적하듯, 세상사 모두 적정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좋다. 지나치게 되면 반드시 부작용과 폐해가 생기기 마련이다. 동기창은 장년 이후 막강한 화단 내 권력을 장악하고 또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그것과 더불어 인간적으로는 가엾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추락하여 버렸다.
그런데 동기창을 둘러싼 악평과 추문은 곧바로 잊혀졌다. 17세기 중반 중국을 휩쓸고 지나간 명말청초의 혼란이 세상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다. 사람들은 동기창의 추악했던 인품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그가 남긴 아름다운 예술 작품에만 눈을 돌렸다. 청대 초기의 위대한 군주 강희제가 그의 작품을 열렬히 좋아했던 것은 이러한 풍조를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18세기 이래 동기창은 중국 회화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두목(杜牧, 803-853)이 지은 <증별>이란 아름다운 한시가 있습니다. 두목은 당의 말기, 그러니까 당시(唐詩)의 시대 구분을 빌자면 만당(晩唐)을 수놓은 대시인이었습니다. 두씨(杜氏) 성을 가진 시인이라 하면, 우리는 당시를 대표하는 두보(杜甫)를 떠올리게 됩니다. 두목은 두보와 더불어 이두(二杜)라 병칭됩니다. 두보를 대두(大杜)라 함에 반하여 두목은 소두(小杜)라 칭해집니다. 두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와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 시인이었던 셈이죠. <증별>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贈別(증별) 이별의 노래
多情卻似總無情(다정각사총무정) 다정하면 오히려 무정하게 비치는 것일까?
唯覺罇前笑不成(유각준전소불성) 술 두루미 앞에 두고 웃음이 지어지지 않는도다.
蠟燭有心還惜別(랍촉유심환석별) 하지만 촛불에 정이 있어 이별을 슬퍼해 주나니,
替人垂淚到天明(체인수루도천명) 날 대신해 날이 새도록 눈물을 흘리는구나.
이 시는 두목이 33살 되던 해인 835년, 어느 여인과 헤어지며 지은 이별시입니다. 증별(贈別)이란, 상대방에게 마음을 담은 증표를 주며 헤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몌별(袂別)이란 말이 서로 소맷부리를 붙잡고 아쉽게 작별하는 것을 가리키죠? 전별(餞別)은 이별이 아쉬워 잔치를 베풀어 주는 것을 가리키고요. 한때 전별금(餞別金)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군요. 전별금이란 우리 모두 알고 있듯, 헤어질 때 돈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애초는 이별이 아쉬워 노자 형식으로 약간의 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권력자가 떠날 때 혹시라도 후일 그 사람과 엮일 것을 대비하여 미리 왕창 돈을 주는 것으로 변했죠. 증별은 몌별이나 전별 등과 같이, 이별의 한 형식 내지 모습을 가리킵니다. 두목은 시인이기 때문에 이 시를 이별의 증표로 선사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다정다감하면 오히려 매정한 듯 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시인은 이별을 앞에 두고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술상 앞에서 웃음을 짓지 못합니다. 그는 이별을 슬퍼하는 여인에게 웃어주며 달래고 싶었습니다.
“내 지금 완전히 가 버리는 것 아니잖아요. 어쩔 수 없이 떠나가지만 금새 돌아올께요.”
하지만 여인을 달래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마음이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또 너무 마음이 간절하여 짐짓 웃음이 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마음이 여려 아픔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안타까움과 슬픔을 술상 곁의 초가 대신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날이 지새도록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죠.
이 이별의 장면이 너무도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이별이 아쉬워 말없이 서로 바라보기만 하는 두 사람, 그리고 그 슬픔을 대신 표현해 주는 듯, 하염없이 녹아내리는 촛불.... 너무 이별이 슬퍼서 서로를 달래주지도 못한 채 수심 가득 찬 얼굴로 가만히 앉아만 있었을 두 사람이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합니다.
참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별 장면이라 생각됩니다. 더욱이 그 이별을 이렇게 멋진 시로 표현하다니 더욱 감동스럽군요. 이런 이별이라면 필시 두 사람의 관계도 서로 사랑이 지극하고 금슬 좋은 부부일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 시에 나타난 이별 장면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두 남녀는 술상을 앞에 두고 이별을 하고 있습니다. 같이 하룻밤을 지내면서 말이죠. 무언가 이상합니다. 부부라면 술잔을 기울이며 이별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의문은 위에 든 시의 앞에 있는 작품을 보면 금새 풀립니다. 사실 <증별>은 두 수로 되어 있는 연작시입니다. 위의 싯귀는 그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 시는 아래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娉娉嫋嫋十三餘(빙빙뇨뇨십삼여) 아리땁고 귀여운 열세 살 남짓의 그대,
豆蔲梢頭二月初(두구초두이월초) 봄 날에 피어난 두구꽃 봉오리 같구나.
春風十里揚州路(춘풍십리양주로) 양저우 거리의 홍등가는 10리나 뻗어 있지만,
卷上珠簾總不如(권상주렴총불여) 주렴 올리고 아무리 찾아도 그대 만한 미인은 없으리.
그렇습니다. 33살의 두목은 13살 짜리 술집 아가씨와 이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양저우는 중국 제일의 도시였습니다. 이 무렵 중국에는 ‘양일익이(揚一益二)’란 말이 있었습니다. 중국 전역에서 양저우가 첫 번째이고, 그 다음이 익주(益州), 즉 오늘날의 청두(成都)란 뜻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양저우에는 유흥가가 흥청망청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두목은 이곳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급기야 열세살 짜리 앳된 아가씨와 정분이 났던 것이죠.
이런 사정을 알고 나니 이 시를 읽으며 느꼈던 애틋한 느낌이 싹 가시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 영 뒷맛이 개운하지 않네요. 하지만 짐짓 이 시가 태동된 배경에 눈을 감으면, 역시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명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도 이 시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마음에 담긴 속내를 잘 드러내지 못하는 모습이 꼭 우리네 한국 사람과 닮은 듯하다 여겨지기도 하니까요.
학창 시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조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조금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배꽃에 달빛이 어리는 한 밤중,
배나무 가지에 서린 봄날의 정감을 두견새야 어찌 알리요마는,
다정다감한 것도 병인 듯 잠을 이루지 못하네.
고려시대의 인물인 이조년이란 사람이 지은 시조이죠. 이 시조의 마지막, 즉 ‘다정도 병인 양하여’란 구절도 바로 두목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 여겨집니다.
두목이 살았던 9세기는 극심한 혼란기였습니다. 한때 찬란하게 위세를 떨치던 당, 즉 대당제국이 볼품없이 쇠퇴해 가고 있었습니다. 조정에는 환관이 날뛰고, 지방에는 절도사라는 무인 세력이 발호하는 상태였습니다. 정치의 질서가 무너지자, 이민족의 침공도 빗발치고 안으로는 농민의 반란도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대당제국에 황혼이 드리워지는 쓸쓸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지식인은 어떠한 모습을 보여야 할까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한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러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조정에서 무도한 환관 세력과 맞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환관이 휘어잡고 있는 조정에 기대할 수 없다 생각하여 농민 반란에 가담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또 어지러운 시대에 절망하여 강호에 묻혀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혼탁한 세상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며 저작에만 몰두하기도 했죠.
하지만 두목은 그처럼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술과 여색에 휩싸여 흐느적거리며 환락을 쫓았을 뿐입니다. 난세라 해도 경제는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시 규모가 커지고, 도시 내 상공업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유흥가도 번성했습니다. 두목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유흥으로 지새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 스스로도 ‘10년 동안 청루(靑樓)를 누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도 못마땅한 세태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라 할 수 있나요? 그건 결코 아니라 생각되는군요.
물론 지식인이라 하여 꼭 세상을 걱정하며 고심참담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죠. 또 사람이 누구나 고결한 모습을 보일 수 없습니다. 모두 투사가 될 수도 없습니다. 지식인도 사람이고 따라서 오욕(五欲)과 칠정(七情)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리 난세라 해도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갈망의 추구까지 그만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목의 방종은 도저히 그러한 차원이라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회가 온통 부조리와 몰상식으로 뒤덮인 상태에서, 그것에 대해 눈감아 버린 채 방탕과 쾌락에 탐닉해 갔습니다. 두목의 시가 아무리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아름답다 하여도, 그가 보여준 고민 없이 살아간 모습, 무절제한 생활은 비난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중국의 중세에 맹동야(孟東野, 751-814)란 시인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비교적 어렵게 살았죠. 과거에도 응시하는 족족 낙방하다가 46살이 되어서야 합격했습니다. 8세기의 46살은 지금과 사뭇 의미가 달랐습니다. 노경에 접어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나이였습니다. 51살 되던 해인 801년에는 남들이 모두 꺼려하는 남방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주변 사람들 모두 불운에 애석해 했습니다.
그때 맹동야의 친구였던 한유(韓愈, 768-824)가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란 유명한 글을 지어 그를 위로했습니다. '맹동야를 떠나 보내며' 정도의 제목이 되겠습니다. 이 글은 역대 최고의 문장 가운데 하나라는 찬사를 받는 작품입니다.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는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무릇 만물은 그 편안함을 잃게 되면 소리를 낸다. 풀과 나무는 소리가 없지만 바람이 뒤흔들어 소리를 내게 한다. 물도 소리가 없지만 바람이 휘저어 소리를 내게 한다. 또 물이 튀는 것은 무언가 내리쳤기 때문이요, 급하게 내닫는 것은 무언가 막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요, 끓어오르는 것은 무언가 뜨겁게 달구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말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쩔 수 없기에 말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노래하는 것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요, 우는 것은 설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릇 입 바깥으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은, 이처럼 모두 편안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한유에 의하면 시와 문장 등의 문학 작품이란, 문인이 세상을 향해 토로하고 싶은 속내라는 것이죠. 마음 속 하고 싶은 말이 정제되어 문학 작품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음 속의 불편함, 즉 불우함이 있어야 문학 작품을 창작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맹동야에게 하늘이 불우함을 내렸지만, 그것은 장차 그로 하여금 훌륭한 문학 작품을 만들게 하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대단히 문학적인 필치로 말하고 있지만, 어떠한 환경에서 좋은 문학 작품이 창작되는지 잘 표현하고 있다 생각됩니다. 안락함과 풍요로움 속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작품이 나오기 힘들죠. 마음 속에 절절한 정서가 있어야 좋은 시나 문장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한유의 표현을 빌자면 문학이든 예술이든, 모두 작가가 세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 말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역시 다른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 만큼 절실한 마음 속 아쉬움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불우한 시절 아름답기 그지없는 작품을 발표하다가, 부와 안락을 얻고 난 다음에는 창작의 동기를 잃어버리는 문학가, 예술가를 수 없이 보았습니다. 예술과 풍요로움은 병립이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즉 세상을 향해 무언가 드러내 표현하기 위해서는, 조금 아쉬운 것, 부족한 것이 있어야 되는 모양입니다.
생각해 보면 비단 문학가나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우리네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절실한 부족함 내지 간절한 욕구가 있어야만 성실해지죠. 절박한 필요가 생길 때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필요가 충족된 다음에는 대부분 안일해지고 나태해 집니다. 또 누군가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까지는 그에게 지극히 순종적이고 겸손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필요한 것을 다 얻어내게 되면, 그 사람을 홀시하고 푸대접하기도 합니다.
왜 우리는 원하는 것이 있든 없든, 필요한 일을 얻어내기 전이든 후든, 한결 같은 마음씨를 보이지 못하는 것일까요? 참으로 세상사는, 아니 인간은 경박하기 짝이 없군요. 그래서 살아가는 일은 헛헛하고 슬픈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 세상사가 이렇게 슬픈 것이기에 사랑의 가치가 더 고귀한 것이겠죠. 사랑은 나보다 상대방을 앞세우는 것이니까요. 평상시 나는 얄팍한 명리에 한없이 흔들리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만은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아내가, 아이들이 그러한 대상이죠. 그리고 우리 부모님에게 내가 그러한 사랑을 받았던 것이고요.
사랑의 범위를 조금 넓혀서 친구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진정한 친구라면 이해 관계에 따라 우정이 흔들려서는 안 되겠죠. 세속적인 외피에 따라 다가섰다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 하여 심드렁해 져서도 안 될 것입니다. 나한테는 그런 진정한 친구가 있는 것인가 돌아보게 됩니다. 현재 나와 가장 가깝다 여겨지는 친구, 그와 나는 어떠한 교분을 나누는 사이일까요?
역사학 논문을 작성한다는 것은 옛날 책을 뒤지며 필요한 자료를 찾아내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치 바닷가의 백사장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논문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 전후 관계를 입증하기 위해, 허구헌 날 옛날 서적과 씨름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 적절한 사료를 찾아내야 된다.
내가 전공으로 하는 분야는 중국의 역사, 그 중에서도 중세인 11세기 전후의 송대이다. 송대에 들어서면 출판 문화가 융성하여 서적의 양도 갑작스레 많아진다. 그 만큼 읽고 검토해야 할 사료의 양도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한글보다도 한문으로 된 책을 더 많이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할 때의 일이다. 본격적인 논문을 처음으로 쓰는 것이니만큼 사료의 검색에도 대단히 공을 들였다. 논문의 주제는 ‘송대의 서리’였다. 매일 같이 한문 서적을 뒤지며 ‘서리’라는 낱말을 찾았다. 물론 송대 서적에서 서리를 꼭 ‘서리’라 지칭하지는 않는다. 통상 ‘리(吏)’라고 약칭한다. 한문 서적의 책장을 넘기며 눈을 부릅뜨고 ‘리’라는 글자를 찾아 나갔다. ‘리’ 자가 나오면 그 다음 전후의 내용을 해석하며, 내 논문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인지를 타진하였다.
그때 읽었던 자료, 즉 ‘리’라는 글자가 나오는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상민중(949-1020)이 낙양의 유수(留守)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승려가 저녁나절 민가를 지나다가 하룻밤 유숙하기를 청하였지만 집 주인이 거절하였다. 승려는 바깥의 수레가 있는 헛간에서라도 자게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밤 그 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여자 한 명을 들쳐 업고서 옷 보따리를 들고 담 넘어 달아났다. 승려는 자지 않고 있다가 그 장면을 목격하였다. 그는 혼자 생각하였다.
‘집 주인에게 거절당하였다가 억지로 재워 주기를 요구했다. 날이 밝아 주인이 여자와 옷가지가 없어진 것을 알면, 틀림없이 나를 붙잡아 관청으로 끌고 갈 것이다.’
승려는 도망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두려운 나머지 큰 길로 가지 못하고 풀밭을 택해 가다가 그만 우물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 속에는 여자가 이미 살해되어 내던져져 있는 상태였다.
이튿날 집 주인은 우물 속에서 승려와 며느리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그는 승려를 관청에 끌고가 처벌해 달라고 하였다. 승려는 체념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며느리를 꼬드겨 함께 도망가다가 갑자기 남에게 잡힐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죽인 다음 우물 속에 던져 버렸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 나도 그만 우물에 빠졌다. 훔친 물건은 우물 곁에서 잃어버렸다. 누가 가져갔는지는 모르겠다.”
승려의 자백은 그대로 관청에 보고되었고, 관청에서는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다. 다만 상민중만은 장물이 발견되지 않은 점 때문에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는 승려를 불러 몇 차례나 심문하였다. 하지만 승려는 죄를 시인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저는 전생에 잘못하여 그 집 주인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에 상민중이 의심쩍어 거듭 심문하니, 승려가 비로소 사실대로 실토하였다.
상민중은 몰래 서리를 보내 장물을 찾아 보게 하였다. 서리가 마을의 주점에서 밥을 사먹고 있는데, 주점의 노파가 관청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서 물었다.
“그 승려 사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서리는 짐짓 돌려 말했다.
“어제 이미 태형을 받아 저자 거리에서 죽었소.”
노파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만일 진범이 잡힌다면 어찌 되나요?”
“관청에서 사건을 종결지었기 때문에, 진범이 나타나더라도 그냥 놓아둘 것이오.”
“그럼 말해도 괜찮겠네요. 그 여자는 실은 이 마을의 젊은이한테 살해되었답니다.”
“그 놈이 어디 있소?”
노파는 그의 집을 가르쳐 주었다. 서리는 즉시 그 집에 가서 체포하였다. 그 사내는 죄를 자복하고 장물에 대해서도 실토하였다. 관청 사람들은 상민중을 두고 귀신같다고 말하였다.
(<송조사실유원>권 23)
위의 이야기는 1005년 무렵, 즉 상민중의 나이 57살 전후에 있었던 일이다. 마을을 지나다가 민가에서 하룻밤 유숙하는 승려에게 실로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졌다. 하필 그 집에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이를 보고 승려는 괜히 겁이 나서 달아나다가 오히려 살인죄의 누명을 뒤집어 썼다. 그리고 운명이라 체념하였는데, 상민중이 사건에 의문을 품고서 마침내 진상을 밝혀냈다. 상민중은 북송 초기의 명신으로 재상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소심한 승려는 도둑이 든 것을 알고 누명을 쓸까 두려워 달아나려 하였다. 마치 오늘날을 사는 우리라도 능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달아나다가 그만 우물 속에 빠져버렸던 것도 애처롭기 그지없다. 더욱이 하필 그 우물에 살해당한 여인의 시신이 버려져 있을 줄이야! 그날 밤 승려에게 닥친 일은, 늘상 지독하게 운이 나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승려는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에 맞서지 않고 순순히 몸을 숙이는 착한 사람이다. 마치 우리가 그러하듯이…… 왜 예나 지금이나 착한 사람에게는 늘 가혹한 운명이 닥치는 것일까?
사료를 뒤진다는 것은 대단히 지겹고 따분한 작업이다. 행여 필요한 내용을 빠트리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여 사료를 읽어가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지겨운 와중에도 가끔 사료 속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그래서 문득 옛날 사람들의 애환이 물씬 느껴지는 장면과 마주하기도 한다.
석사 논문을 준비하던 30여년 전의 어느 날, 위 자료를 읽고 나서 가련한 승려 생각에 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11세기 중엽 중국의 양쯔강 인근에 갓 결혼한 어느 여인이 살고 있었다. 젊고 대단히 아름다웠다. 시어머니에게도 아주 잘 했다. 남편은 상인이었는데 같은 동네의 친구와 함께 먼 곳으로 오가며 물건을 팔고 다녔다. 남편과 친구는 집안끼리도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 친구의 눈에도 여인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는 점차 여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친구는 장사하러 나갔다가 여인의 남편과 둘이서 양쯔강 기슭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남편을 밀어 강물 속으로 빠트렸다. 남편은 물에 빠져 죽으며 주변에서 이는 물거품을 가리키며 말했다.
“훗날 이 물거품이 내 원한을 풀어줄 것이다.”
남편이 빠져 죽은 것을 확인한 후 친구는 큰 소리로 사람을 불러 도와달라고 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남편의 시체를 건져냈다. 친구는 통곡하며 슬퍼하였다. 그리고 마치 형제에게 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장례 준비를 해나갔다. 돈 주머니에도 전연 손을 대지 않았다. 장사로 번 돈도 정확히 둘로 나눴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또 정중히 예를 갖춰 친구의 상을 치렀다.
그 다음부터 그는 매일같이 친구의 집에 찾아가 그 어머니를 친어머니 같이 보살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여인은 시어머니가 연로한 것이 마음에 걸려 차마 혼자 두고 떠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점차 자기에게 잘 해주는 남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도 모두 남자를 두고 칭찬하였다. 친구의 어머니는 여인에게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어떻느냐고 물었다. 그때까지 남자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다. 여인 또한 아직 젊은 나이였다.
이렇게 하여 남자는 마침내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금슬이 좋았다. 둘 사이에서 아이도 몇이 태어났다.
결혼하여 한참이 지난 어느 여름 날이었다.제법 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남자는 처마 밑에 앉아 그 비를 바라보다 빙그레 웃었다. 마당에는 떨어지는 비에 작은 물거품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여인이 왜 웃음을 짓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한사코 대답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하여 여인이 더 캐물었다. 남자는, ‘이제 결혼하여 몇 년이나 지났고 아이도 태어났으니 말해도 별 탈 없겠지.’ 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너무도 그대를 좋아하여친구를 죽였어. 그 친구가 죽을 때, ‘물거품이 원한을 풀어줄 것이다.’ 라고 말했었지. 지금 비가 내려 생기는 물거품을 보니 그 말이 생각나 웃는 것이야.”
여인은 속으로 너무도 놀랐지만, 아무 말 없이 웃는 체 했다. 그리고 남자가 출타한 다음 관아에 나가 고소하였다. 남자는 취조 끝에 모든 사실을 자백하였다. 그리고 사형을 당했다.
남자가 죽은 후 여인은 슬피 울며 말하였다.
“내 용모 탓에 두 남편을 죽였구나. 어찌 더 살아갈 수 있으리오?”
여인은 회하(淮河, 화이허)로 가서 자살하고 말았다.(<계륵편>권 하)
남송시대에 저술된 책인 <계륵편(鷄肋編)>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계륵’은 ‘닭의 갈비’란 뜻이다. 버리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먹자니 별로 뜯을 만한 고기도 없는 것을 말한다. 책의 내용에 대한 겸손을 나타내는 제목이라 하겠다. <계륵편>은 주로 정치와 문학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지만, 가끔 이렇게 자못 흥미로운 민간의 일화도 등장한다.
11세기 중엽이라 하면 대략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 전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이 글의 주인공은 회하 인근에 살았던 젊고 예쁜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을 사랑했던 남자이다. 여인은 예쁜 용모만큼이나 정숙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첫 번째 남편이 사망한 다음에도 늙고 의지할 데 없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남자 또한 사랑에 눈이 멀어 친구를 죽였던 것만 제외하면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 년이나 친구의 어머니와 여인에게 지극정성을 다하는 일은 쉽지 않다. 거칠고 삐뚤어진 사람이었다면 그 사이 친구 어머니나 여인에게 본성을 드러냈을 것이다. 결혼하여 금슬 좋게 살아갔다는 것도, 여인과 남자 모두 범상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어여쁜 용모를 지닌 탓에 여인은 기구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인에게 아름다움은 최고의 가치이다. 더욱이 여인은 정숙하고 반듯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 성품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용모와 성품이 여인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를 불행으로 이끌고 말았다. 여인의 가여운 인생이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그리고.....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친구를 살해하고 급기야 자신도 그 죄의 값으로 사형을 당하는 남자 또한 연민을 느끼게 한다. 하필이면 남의 아내가 된 여인, 그것도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일까? 사랑이란 사람에 따라 이처럼 가슴 아픈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인가. 그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고, 그로 인해 굴곡진 인생을 살아야 했다.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 여인이 다른 남자 곁에 있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쟁취하고 난 다음 얼마간 행복을 느꼈겠지만, 그 사랑은 끝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남녀 사이에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축복이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토대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으로 인해 슬퍼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 11세기 중엽을 살아갔던 중국의 여인, 그리고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의 이야기가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왕안석(王安石, 1021∼1086) ⎯⎯,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다. 심지어 중국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땅에서 살았던 레닌도 그에 대해, ‘중국 11세기의 개혁가’라 칭하고 있을 정도이다. 왕안석은 역대의 황제 몇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중국 역사상의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등장과 함께 송대의 역사는 급속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는 국가의 모든 것을 뜯어 고쳤다. 정치, 경제, 교육, 군사, 사회 등 모든 것이 개혁이 대상이었다. 이러한 개혁을 두고 통상, ‘왕안석의 신법’, 혹은 ‘왕안석의 변법’이라 부른다. 신법의 도입과 더불어 북송의 역사는 전연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였다. 이후 금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북송의 역사는 왕안석 및 그가 도입한 신법을 둘러싼 논란으로 지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단 북송뿐이 아니었다. 남송 시대에도 그가 드리운 그림자는 정치, 경제, 문화의 각 분야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면서 북송의 정계는 확연히 두 진영으로 갈라섰다. 즉 왕안석 신법에 동조하는 측 및 그것에 대해 반대하는 측이 그것이다. 이 양 진영을 ‘신법당’과 ‘구법당’이라 부른다. 구법당은 왕안석 및 신법에 대해 실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왕안석 신법이 시행되던 시기 신법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신법당에 속했던 인물들은 오히려 소수였다. 대다수의 관료들, 특히 명망 있는 원로라든가 중견 사대부들은 모두 구법당이었다. 이는 무슨 연유에서 그렇게 된 것일까?
우리는 ‘왕안석의 신법’이라 하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개혁’이라 알고 있다. 심지어 구법당이 신법에 대해 반대한 것은, 그들이 대지주 및 대상인들과 이해 관계를 같이 하는 집단이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즉, 신법은 중소 지주나 중소 상인을 보호하려는 취지를 지니고 있었고, 이것이 대지주나 대상인의 이익을 침해했기 때문에 구법당이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서 아직껏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구법당을 대표하는 인물은 사마광, 한기, 부필, 구양수, 소식, 정호 등이다. 모두 한결같이 그 시대 최고의 명신이자 최대의 학자들이었다. 사마광은 유명한 역사서 ≪자치통감≫의 저자이다. 한기와 부필은 왕안석이 집권하여 개혁을 추진할 당시 정계 최고의 원로였다. 또 정호는 동생 정이와 더불어 성리학을 대표하는 대학자이다. 구법당 진영의 인물들은 모두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학자들이었다. 설마 이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해에 기반하여 ‘약자의 보호’라는 선의를 지닌 신법에 반대했으랴? 하물며 그들이 신봉하는 유학, 그리고 성리학은 천하 창생(蒼生)을 향한 인의(仁義)를 표방하는 것이지 않는가. 그들이 계급적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신법이 창생에게 절대적 선(善)이었다면 그것에 대해 전면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신법당과 구법당의 대립을 계급적 이해 관계에 기반하여 해석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다. 그러한 해석은 20세기 초중반 지식인 사회를 지배하던 유물사관에 따른 것이었다. 역사를 오로지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인식해야 된다고 여겼던 시대의 산물이다.
왕안석의 신법이 ‘약자의 보호’라는 사회정책적 측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재정 확충의 추구’라는 지향이 비교할 수 없는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왕안석에게 이른바 겸병지가(兼幷之家), 즉 대지주 및 대상인으로부터 중소 농민과 중소 상인을 보호한다는 정신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재정 확충이 그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의 집권기를 통해 신법의 시행 실적을 가지고 지방관에 대한 고과를 결정하였다. 신법의 시행 실적이란, 다름 아니라 신법을 시행하여 얼마나 많은 재정의 잉여를 남겼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관들은 왕안석이 지니고 있었던 또 다른 지향, 즉 ‘약자에 대한 보호’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무리를 감수하며 신법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숱한 폐단이 발생하였다. 구법당 인사들이 지적했던 것, 즉 ‘신법이 천하 백성으로부터 원망을 산다.’는 정황이 이러한 구조에서 등장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은 잘 알려져 있다 시피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당송시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것이다. 또한 시인과 사인(詞人)으로서도 결코 무시 못할 지위를 점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유학자로서도 당대 최고의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왕안석은 자신의 학문, 즉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유학의 결정판이라 자부하였다. 그의 학문을 신학(新學)이라 부른다. 신학은 북송 중기와 후기를 통해 도학(道學), 즉 후일의 정주학(程朱學)보다 월등히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그는 자신의 유교 경전에 대한 해석, 즉 ≪삼경신의(三經新義)≫와 ≪주관신의(周官新義)≫를 과거 시험의 기본 텍스트로 삼았다. 심지어 문자학에 있어서도 자신의 이해(≪字說≫)가 최고로 타당한 것이라 여겼다.
이렇듯 박학다식하였던 그는,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었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두고 모두 유속(流俗)에 찌들었다고 몰아세웠다. 이러한 독선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신법을 둘러싼 논란은 더욱 첨예해졌다.
왕안석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 것은 학부 4학년 졸업 논문을 작성할 때부터였다. 이래로 30여년, 그 사이 다른 분야나 주제로 관심을 돌린 적도 많았으나, 왕안석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유지하였다. 10여년 전부터는 틈틈이 왕안석의 평전도 적기 시작하여 이제 거의 막바지 단계에 와 있다. 이 자료집의 출간, 그리고 미구에 완성될 평전을 마지막으로 왕안석에 대한 독서와 관심을 마무리지으려 한다. 이로써 30여년에 걸쳤던 왕안석이란 인물의 탐색을 그만 둔다 생각하니 감회가 없지 않다.
이 책은 왕안석 및 왕안석 신법과 관련한 주요 사료들을 모아 해석한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자 원문을 첨부하는 한편, 가능한 한 상세하게 역주를 붙이고자 했다. 이 책을 펴내게 된 데는 한국외국어대학교가 코어(CORE) 사업, 즉 대학 인문역량 강화사업을 수행하는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코어 사업의 일환으로서 인문총서의 발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었고, 그 지원을 받아 이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연구비를 지원해준 코어사업단의 여러 관계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이 책은 2009년도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과제인 <9세기~13세기 한족과 북방민족 관계사 연구동향>의 연구결과물이다. 연구의 범위는 9세기 이래 13세기로서, 중국 왕조로 치자면 당(唐) 후반기로부터 송(宋)과 요(遼)·금(金), 그리고 몽골제국 초기에 이르는 시기이다. 대략 송조의 성립과 멸망을 전후한 시대 한족과 북방민족 사이에 관계사가 어떻게 연구되어 왔는가를 고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당 왕조의 후반으로부터 송대의 시기를 통해 중국사회에는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이를 중국사학계에서는 ‘당송변혁’이라 부르거니와, 그 변화의 내용은 정치와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있었다. 중국의 대외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 후반기 이래 북방민족의 활동은 이전과 전연 다른 양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수당시대의 돌궐과 위구르와 비교하여 오대, 송 이후의 거란이나 금, 서하 등은 판연히 다른 존재였다. 이들은 국가의 구조는 물론이려니와 민족적 자각, 중국에 대한 태도 등에서도 전연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 책은 이렇듯 당송변혁기에 들어 판이한 형태를 띠는 한족과 북방민족 사이의 관계사, 그리고 그것에 대한 연구가 어떠한 동향을 보이는가 하는 점을 살펴본 결과물들이다. 다만 검토의 대상은 중국 대륙의 연구만으로 한정시켰다. 이는 무엇보다 연구자들의 역량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연구과제의 기획 자체 중국 대륙학계의 대외관계사 연구동향을 점검한다는 지향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학계의 대외관계사 연구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고 거기에 어떠한 방향이 감지되는가, 그리고 나아가 그러한 연구 동향에 중국 당국의 정책적 판단이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점을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중국의 대외관계사 연구, 특히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 지역의 연구를 정확히 인식하고, 이에 기반하여 경쟁력 있는 한국사 연구의 체계를 수립하는데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역사학은 단순한 학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난 역사에 대한 건강한 인식이야말로 그 자체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관용을 지닐 수 있게 하는 원천이 된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현대의 무한 경쟁 시대에서, 역사는 국가의 귀중한 자산이자 역량이 되기도 한다.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든가 일본의 독도 영주권 주장 등을 통해 생생히 체험한 바와 같다.
Ⅱ.
이 책에서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주제는, (1) 당대 후반기의 한족과 북방민족 관계사, (2) 오대 왕조와 거란의 관계사 연구, (3) 북송과 요 사이의 관계사 연구 동향, (4) 서하사 연구 동향, (5) 송금 관계사 연구 동향, (6) 남송-몽골 관계사 연구의 여섯 가지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주제를 제외하면 모두 송조와 북방민족 국가 사이의 대외관계사이다. 각각의 주제와 관련한 연구의 동향은 해당 논문에서 소상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중복을 피하여 중국 학계의 송대사 연구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 간략히 언급해 두기로 한다.
중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송대사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었다. 고대사나 근대사 등의 여타 시대사연구가 이미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시작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뒤늦은 것이었다. 그 첫 세대 연구자들이 바로 오늘날 중국 송대사 연구의 기초를 다진 멍원퉁(蒙文通), 장인린(張蔭麟), 첸러쑤(陳樂素), 덩광밍(鄧光銘) 등이었다. 이들은 1930년대 중반 이래 1940년대 초반에 걸쳐 베이징(北京) 대학 등지에서 송사(宋史) 강좌를 개설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들 중에서도 덩광밍(1907~1998)은 멍원퉁에게 수학한 제자로서 사실상 송대사 연구에 제1세대의 연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1930년대에 본격적인 송사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그의 연구는 중국 학계의 송대사 연구를 선도하고 또 대표하는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업적은 비단 송대사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제자 양성을 통해서도 송대사 연구의 발전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훈도를 거쳐 배출된 제자들, 예컨대 치샤(漆俠)와 왕청위(王曾瑜), 장시칭(張希淸), 덩샤오난(鄧小南) 등은 오늘날 중국 송대사 학계를 대표하는 연구자들로 활동하고 있다.
멍원퉁, 장인린, 첸러쑤, 덩광밍 등의 연구와 강의는 중국의 각지에 송대사 연구의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하였다. 멍원퉁의 영향으로 베이징대학과 쓰촨대학에, 장인린과 첸러쑤의 영향으로 저쟝대학(예전의 杭州大學)에, 그리고 덩광밍의 영향으로 베이징대학에 송사연구의 전통이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 토대가 닦인 북경대학, 절강대학, 사천대학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국에서 송대사 연구를 대표하는 중점 기지들로 기능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의 송대사 연구는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문화대혁명과 함께 된서리를 맞았다. 순수한 학문연구는 타기되고, 역사학은 현실 정치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해야 한다는 영사사학(影射史學)만이 판을 쳤다. 이 기간에 발표된 역사학 논문들은 모두 유법투쟁(儒法鬪爭)이라든가 농민기의, 인물평가 등과 관련된 것들 뿐이었다. 그것들마저도 철저히 문화대혁명의 계급투쟁에 기여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1971년 린뱌오(林彪)가 사망한 후에는 이른바 ‘비림비공(批林批孔)’ 및 ‘수호전(水滸傳) 비판’이 역사학의 대세를 점하였다.
1960년대 이래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 시기는 비단 역사학 뿐만 아니라 학문 전체에도 커다란 암흑기였다. 이 기간 역사학자들은 붓을 꺾고 침묵해야 했다. 모든 역사학자들의 연구경력에서 이 시기의 논문발표 실적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황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학문의 암흑기에도 개별 학자들의 연구와 절차탁마는 지속되었다. 오늘날 중국의 송대사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왕청위(王曾瑜)가 이 험난한 시기에 <송회요집고>의 정독에 매진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되고 ‘영사사학(影射史學)’이 아닌 자유로운 학문연구의 기풍이 보장되자, 원로학자들을 중심으로 곧바로 중량감 있는 송대사 연구의 논저가 발표되기 시작하였던 것도 그러한 차분한 절차탁마의 지속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1977년 중공 당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종료 선언은 송대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송대사 학계는 재앙과도 같았던 문화대혁명 시기의 상처를 딛고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남긴 후유증은 컸다. 1980년대 초에 이르도록 송대사 학계는 그 영향으로 (1) 송강(宋江) 문제, (2) 악비(岳飛) 문제, (3) 농민기의, (4) 왕안석(王安石) 변법 등의 주제에 매달려 있었다. 농민기의는 물론이거니와, 송강이 과연 투항파였는가, 악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등의 주제도 문화대혁명 시기의 영향을 청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왕안석 변법과 관련된 연구 역시, 문화대혁명 시기 왕안석을 법가(法家)의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하던 것을 반성하고 재평가하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연구와 문화대혁명 시기의 반성을 거치면서 중국의 송대사학계는 신속하게 재정비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이후가 되면 송대사 연구자 전체를 아우르고 상호간 교류와 소통을 위한 학회가 창립되었으며, 학문후속세대의 양성을 위한 연구기지의 재건도 본격화하였다.
오늘날 송대사학계를 대표하는 연구단체는 중국송사연구회(中國宋史硏究會)이다. 중국의 송사연구회는 1980년 덩광밍(鄧廣銘)의 주도로 상하이에서 결성되어 첫 번째 연회(年會)를 개최하였다. 제1차 연회에서 발표되었던 논문들은 <송사연구논문집(宋史硏究論文集)>(上海古籍出版社, 1982)이란 명칭으로 묶여져 발표되었다. 이후 송사연구회는 대략 2년만에 한 차례 씩 연회를 개최하고 그 결과물들을 묶어 <송사연구논문집>이란 이름으로 발간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송사연구회의 연회는 2008년까지 13차례의 연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중국의 송사연구 기지 가운데 가장 먼저 설립된 것은 베이징대학의 고대사연구중심(古代史硏究中心)이다. 1980년 송사연구회의 창립과 함께 그 회장으로 추대되었던 덩광밍이 개설한 연구기지였다. 그 뒤를 이어 등광명의 첫 번째 제자인 치샤(漆俠)에 의해 설립된 허베이(河北)대학의 역사연구소(오늘날의 宋史硏究中心), 장인린(張蔭麟) 및 첸러쑤(陳樂素)의 제자인 쉬구이(徐規)에 의해 설립된 항저우(抗州) 대학(오늘날의 浙江大學)의 송사연구실(후에 南宋史硏究中心으로 발전), 멍원퉁(蒙文通)의 제자인 후쟈오시(胡昭曦)에 의해 설립된 쓰촨(四川) 대학의 송사연구실, 역시 멍원퉁의 제자인 주루이시(朱瑞熙)에 의해 설립된 상하이사범대학의 송사연구실, 허베이대학 역사연구소 출신의 학자들이 설립한 허난(河南)대학 역사연구소, 그리고 장인린의 제자인 리옌(李埏)에 의해 설립된 윈난(雲南)대학의 봉건경제사연구실(封建經濟史硏究室) 등이 속속 연구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연구기지는 현재까지도 중국내 송사 연구의 중심처이자 주요 송사연구자를 배출하는 요람의 역할을 하고 있다.
Ⅲ.
1950년대 이래 2000년 이후의 오늘날에 이르는 중국학계의 송대사 연구 동향을 살필 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가 유물사관의 퇴색과 이른바 ‘애국주의’ 경향의 증대라 할 수 있다. 그런 애국주의 조류가 여타 관점을 압도해가는 흐름은 본서에 살펴본 한족과 북방민족 관계사 연구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2010년대에 들어선 오늘날, 애국주의 사관은 여타의 관점을 압도하는 지고의 가치로 인식되고 있다. ‘중화민족론’, ‘다원일체론’, ‘통일적다민족국가론’ 등으로 불리는 새로운 중국사 인식은, 전통적인 중국사의 인식체계를 송두리 채 뒤흔들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애국주의는 이제 1950년대 이래의 유물사관이 누리던 지위를 대체하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횡행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현대 중국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오늘날 중국 당국이 가장 부심하고 있는 정책적 과제 가운데 하나가 소수민족 문제이다. 현재 중국은 공식적으로 55개 소수민족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 대부분은 중국 중앙정부의 통치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티베트 족이라든가 위구르 족처럼 한족에 대해 커다란 적개심을 지니고 있는 민족도 있다. 이러한 이질적 민족들을 다독거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 아래 안주시키는 것이야 말로, 중국의 통치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중국 교육당국에서는 중국역사의 주체가 한족이 아니라 중화민족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 역시 한족이 중심을 이루는 국가가 아니라 ‘통일적다민족국가’라고 한다. 한족만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소수 민족이 어우러져 중국이라는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여진족이나 거란족, 몽골족, 위구르족, 티베트족, 그리고 심지어 조선족까지 중화민족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라는 시각이 아직 중국학계에 완전히 정착한 것 같지는 않다. 본서의 여기저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중국의 송사연구자들은 전반적으로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대전제를 수용하면서도 연구의 세부 분야에 들어가면 구래의 한족 중심적 민족주의를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입장의 고수는 특히 원로에 속하는 학자일수록 더욱 강하다.
중국 당국의 지향과 중국인, 특히 한족 원로 학자의 민족적 정서 상이의 상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주제의 하나가 알비(岳飛)의 평가 문제이다. 중국이 통일적다민족국가라는 관점에 입각한다면, 북송과 남송뿐만 아니라 요와 금 등도 중국을 구성하는 정권의 하나가 된다. 동일한 논리에서 송과 금 사이의 전쟁도 중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일어난 내전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악비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남송과 금의 전쟁이 내전이라면, 더 이상 전통적인 관점에 따라 악비를 ‘민족의 영웅’이라든가 혹은 ‘구국의 영웅’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대략 199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 학계의 악비에 대한 평가는 전통적인 입장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악비와 진회의 대립구도를 ‘민족영웅’과 ‘매국노’라 이해하였다. 하지만 중국 당국의 민족정책이 강화되고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 대세를 이루어가면서 악비에 대한 평가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정책 당국의 입장에 따르는 견해가 점차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악비 평가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악비연구(岳飛硏究)>라는 부정기 간행물이다. 이 간행물은 악비의 사당이 있는 항저우에서 발간된다. 1988년 1집이 나온 이래 지금까지 5집이 발간되었는데, 1996년에 간행된 4집까지만 해도 악비를 민족 영웅이라 인식하는 논문이 절대 다수였다. 그런데 중국 당국의 민족정책이 강화되며, <악비연구>는 거의 10년만에 5집이 가까스로 발행되었다. 그리고 5집에 수록된 논문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악비와 무관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사실상 <악비연구>가 아니라 <송대사연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악비라는 인물이 지닌 정치적 민감성,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악비에 대한 관심의 저하 등이 반영된 산물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학문 조류의 변화, 즉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의거한 악비 재평가의 흐름속에서도 왕청위(王曾瑜)나 리시호우(李錫厚) 등과 같은 원로학자들은 여전히 악비를 민족영웅으로 서슴없이 규정하고 있다. 특히 왕청위의 경우, 2002년도에 출간한 저서 (<岳飛和南宋前期政治與軍事硏究>,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2002, 4쪽)에서도 악비와 진회를 선명하게 선과 악의 대립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국가에는 역사가 없으면 안 된다. 특히 중국과 같이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나라에 있어 역사상에는 영광과 치욕이 병존하며 정의와 사악함이 서로 투쟁하였다. 우리는 진보와 퇴보가 모두 존재했던 역사를 공부하며 교훈을 얻어 민족 진보의 영양소로 삼아야 한다. 남송초의 시기에 있어 이강(李綱)과 종택(宗澤)·악비가 한 편이었고, 송의 고종과 황잠선(黃潛善)·왕백언(汪伯彦)·진회 등이 다른 한 편이었다. 이는 전형적인 영광과 치욕, 정의와 사악함, 진보와 퇴보의 투쟁이었다.
왕청위는 오늘날 중국의 송대사학계를 대표하는 원로 학자이다. 그는 덩광밍과 치샤의 뒤를 이어 중국송사연구회의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그에게 있어 악비에 대한 평가는 중국 당국이 부심하고 있는 민족정책과는 범주가 다른 문제라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동료이자 요사(遼史) 연구의 원로인 리시호우는 심지어, ‘현재적 관점에 구애되어 역사상의 시비를 재론해야 한다면 그것은 역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岳飛與紹興和議」, <宋史硏究通訊>42, 2003) 라고까지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중국 당국은 현재 정책적으로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전파하고 있고 그것의 강조가 시간이 흐르며 더욱 강화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중국학계에서 감지되는 역사 인식체계상의 혼돈도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 추정된다. 본서에서는 연구물 숫자의 제약으로 그 필자의 연령 분포와 논저의 성격을 대비하는 작업은 진행시키지 못했다. 만일 그러한 작업이 가능한 주제와 분야라면, 분명 연구자의 연령 구성 및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용해 정도가 상호 대응하는 면모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족 및 북방민족 왕조사이의 접촉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중국에서 극히 중요한 현재적 의미를 내포하는 주제이다. 1980년대 이래 중국에서는 개혁 개방 정책의 추진과 더불어 중화민족 일체론의 관점에 의거한 중국내 각민족의 통합내지 융합이 절실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현재적 필요성이 한족과 북방민족 관계사의 연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그 접촉 및 교류의 역사에 대한 이해의 시각을 전면적으로 굴절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