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 속에서 이룬 작은 안정 : 남송의 효종과 그 치적

중국역사 읽을거리

2012-10-30 22:00:39


 

     난국 속에서 이룬 작은 안정 : 남송의 효종과 그 치적

 

 

 

  

 
     머리말
  1. 멀고도 험난했던 즉위 과정
  2. 금과의 대립과 절충
  3. 효종의 내치
    맺음말

 

 

 

  머리말

  송의 제1대 황제 태조 조광윤과 그 뒤를 이은 태종 조광의 사이의 제위 계승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태조와 태종은 형제 간이었다. 9761220, 중병에 걸린 50세의 태조는 환관 왕계은을 시켜 둘째 아들을 불러오게 했다. 그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줄 심산이었다. 하지만 왕계은은 즉시 이 사실을 태종에게 알렸다. 왕계은은 이미 오래 전부터 태종과 내통하고 있었다. 태종이 태조의 병실(寢殿)에 들어간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큰 소리가 오갔다. 촛불 속에 태종이 이리저리 오가는 모습이 보였고, 또 심상치 않은 도끼 소리도 들려왔다. 이러한 상태에서 태조가 죽고 이튿날 태종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 송 태조(왼쪽)와 태종 >

 

 

  후일 태조가 태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러한 태조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촛불 속의 도끼 소리(燭影斧聲)’라 부른다.

  태종이 황제가 된 이래 황제 자리는 태종의 후손에게 전해졌다. 태조 조광윤은 송을 창건하였지만 그 후손들은 황제 자리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훗날 언젠가 태조의 후손들이 다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풍설이 생겨났다. 태조의 후손을 황제로 옹립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태종이 황제가 되고 무려 186년 후 그 풍설은 거짓말처럼 실현되었다. 바로 남송의 두 번 째 황제 효종에 의해서다. 효종은 고종에 의해 선택되어 황제가 된 인물이다. 고종은 아들이 없었고, 그래서 멀리 태조의 후손 가운데 후계자를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태조의 7대손인 효종이 난데없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효종이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은 1162년부터 1189년까지의 28년간이다. 효종의 통치기는 남송 전체를 통해 가장 사회가 안정된 시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남송 말기의 학자들은 효종 시대를 성세(盛世)’라 부르며 동경하였다. 북방의 여진족이 세운 금의 압박도 효과적으로 견제하였을 뿐더러, 정치와 경제 등의 분야에서도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였다.

  남송은 건립 이후 멸망에 이를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민족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초기에는 여진족의 금에게, 그 다음에는 더욱 강력한 세력인 몽골의 압박에 쫓겼다. 대외 위기로 말미암아 정치, 경제, 사회 구조도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이러한 남송의 역사 가운데 효종의 시대만은 이례적으로 평화가 깃들었던 것이다. 난국 속에서 안정을 일궈낸 군주, 효종의 치세는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굴절되어 갔던 것일까? 효종 시대에 드리워진 문제는 무엇이었으며 이에 대해 효종은 어떻게 대처해 갔던 것일까?

 

 

1. 멀고도 험난했던 즉위 과정

  남송을 세운 황제 고종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21살에 얻은 아들이 하나 있었으나 요절하였다. 이후 오랫동안 자식을 얻지 못하자 종실 가운데 양자를 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고종은 태종 계열보다는 태조의 후손 가운데서 후보자를 찾았다. 혈연적으로 가까운 태종의 자손을 제쳐 두고 굳이 태조 후손에서 양자를 들이고자 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먼 친척 중에서 뽑아야 더 고마워하고 또 그런 만큼 자신의 말을 더 잘 들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1132(소흥 2) 5, 수소문 끝에 태조의 7대손인 조백종(趙伯琮)과 조백호(趙伯浩)가 선발되어 궁궐에 들어왔다. 두 사람을 두고 고종이 직접 한 사람을 고르기로 했다. 둘이서 고종 앞에 서 있을 때 마침 고양이 한 마리가 갑작스레 달려왔다. 이를 보고 백호는 발로 걷어찼으나 백종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백호는 성격이 경박하다는 이유로 탈락하고 백종이 최종적인 낙점을 받았다. 당시 조백종의 나이는 6살이었다.

  백종은 입궁하여 후궁 장씨(張氏)의 처소에서 양육되기 시작하였다. 이름도 조원(趙瑗)이라 바뀌었다. 이때로부터 1162년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30년 간, 그는 고종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중흥의 4 장군> 남송을 금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낸 4사람의 장군들. 왼쪽부터 악비와 장준, 한세충, 유광세. 각각 시종 한 명씩을 거느리고 있다.

 

 

  1134(소흥 4) 조원에게 경쟁자가 하나 생겼다. 후일 황후가 되는 고종의 총비 오씨(吳氏)가 또다른 아이의 양육을 청원하여 조백구(趙伯玖)를 입궁시켰기 때문이다. 조백구는 조거(趙璩)라 개명되었다. 조거는 조원보다 3살이 어렸다. 조원과 조거는 똑같은 처우를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조거의 후원자인 오씨는 자신이 키우는 아이(조거)를 후임 황제로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조원과 조거는 16살이 되면서 관례에 따라 차례로 출궁하여 바깥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거처는 동부(東府)와 서부(西府)라 불렸다. 호칭과 처우도 동일하게 주어졌다. 조정의 관료 가운데는 두 사람과 선을 대며 미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조원은 조용하고 근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려서부터 희노애락을 안색에 드러내지 않았다. 항상 독서에 몰두하고 무예를 닦았다. 입고 먹는 것 또한 매우 검소하였다. 이 때문에 고종은 조거가 입궁한 이후에도 내심 조원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다.

  고종은 조원과 조거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시험하기 위해 각각 궁녀 10명씩을 하사하였다. 얼마 후 궁녀들을 모두 불러 살펴보니, 조거는 10명 모두를 범하였지만 조원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 상태였다. 고종을 이를 보고 마침내 조원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1160(소흥 30) 2, 마침내 조원은 정식으로 고종의 아들이 되었다. 이름도 다시 조위(趙瑋)로 고쳐져서 건왕(建王)에 봉해졌다. 조거는 고종의 조카(皇姪)로 정해졌다.

  오랜 세월 기다린 끝에 난관을 모두 극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조위에게는 또 하나의 위기가 찾아왔다. 1161(소흥 31) 금의 해릉왕이 남침했을 때의 일이다. 고종은 금의 대거 남침이라는 위기에 직면하여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친정을 발표하였다. 이에 건왕 조위가 고종의 환심을 사려고 군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이것에 고종이 대노하였다. 고종은 당 중기 안사의 난이 발생했을 때, 황태자가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다가 자립하여 황제(肅宗)가 되었던 사실을 떠올렸던 것이다. 건왕 조위는 스승으로 있던 사호(史浩)의 권유를 받아들여, 고종을 호위하며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겠다는 내용의 상주문을 올렸다. 또 어떠한 직위도 맡지 않고 고종의 좌우에 머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러한 거듭된 다짐에 고종의 의심이 가까스로 풀렸다.

   


                                                                        <남송 고종과 그의 필체>

   

  금과의 전투가 일단락된 11625월, 고종은 건왕 조위를 황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 한 달 후인 6, 고종이 퇴위하고 건왕 조위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 고종의 나이는 56, 효종은 36살이었다. 고종은 태상황이 되었고 황후 오씨는 태상황후가 되었다. 그들은 과거 권신 진회가 살던 곳을 덕수궁(德壽宮)이라 이름을 고치고 그리로 이주하였다.

 

 

2. 금과의 대립과 절충

  효종은 즉위 직후부터 금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문제에 매달려야 했다. 금 해릉왕의 남침은 116111월 남송의 명신 우윤문(虞允文)이 채석(采石)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끝났다. 해릉왕은 내부의 반란으로 피살되고 그 대신 금에서는 명군이라 일컬어지는 세종이 즉위하였다. 금은 효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1633월 사신을 보내왔다. 금측은 송에 대해, 채석의 전투 이후 송측이 점령한 지역의 반환 및 세폐의 지급을 요구하였다.

  남송은 고종 시대인 1142년 금과 강화 조약을 맺었다. 이를 당시의 연호를 따서 소흥(紹興)의 화의(和議)라 부른다. 소흥 화의에서는 금과 남송의 관계를 군신 관계로 규정하였다. 또 남송이 금에 대해 매년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지급하고, 이를 세공(歲貢)이라 부르기로 했다.

  금이 사신을 보내 소흥 화의의 이행을 요구하자, 남송은 양국의 지위를 평등하게 하고 국경을 재조정하자고 응답하였다. 금은 이를 거절하였다.

  효종은 전쟁을 통해 굴욕적인 대금 관계를 청산하고자 했다. 11635월 남송은 6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벌에 나섰다. 하지만 남송의 군대는 금과의 국경인 회수를 건넌 직후 대패하였다. 남송의 군사력은 금의 남침을 가까스로 막을 정도는 되지만, 금의 영역으로 진군하여 화북을 탈환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남송의 북벌이 실패로 끝난 후 금은 다시 사신을 보내왔다. 금이 제시한 강화의 조건은 소흥 화의에 비해 다소 남송측에 유리한 것이었다. 대신들 사이의 의견은 엇갈렸다. 효종 역시 금이 제시한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자 진회 계열인 탕사퇴(湯思退)가 주장하였다.

  “태상황에게 알려 그 뜻을 따르는 게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효종은 화를 냈다.

  “저들이 이처럼 무례한데도 그대는 화의를 주장하는가? 현재 금의 기세는 과거 진회 때와는 다르다.”

  하지만 태상황으로 물러나 있던 고종은 효종에게 금과의 화의를 강요하였다. 이에 밀려 효종은 어쩔 수 없이 화의를 진행시켰다. 남송과 금 사이의 강화는 1164(융흥 2) 12월에 체결되었다. 이를 당시의 연호를 따서 융흥(隆興)의 화의라 부른다. 융흥 화의에서는 종래 군신 관계로 규정되어 있던 금-남송 관계를 숙질, 그러니까 숙부와 조카 사이로 바꾸었다. 물론 남송의 황제가 금 황제에 대해 숙부라고 칭하기로 한 것이다. 또 매년 금에 지급하는 물자의 양도 20만 냥 비단 20만 필로 정했다. 이전에 비해 각각 20%가 줄어든 셈이다. 또 그 명칭도 세공(歲貢)’이 아니라 세폐(歲幣)’라 부르기로 했다.

  융흥 화의로 인해 남송의 지위는 이전에 비해 현저히 높아졌지만 여전히 굴욕적이었다. 이를테면 금의 사자가 국서를 갖고 오면, 남송의 황제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지 못하고 반드시 자리에서 내려와 받아야만 했다. 효종은 이후 계속 금에 대해, 금 사신 접대 방식의 개정과 북송 황릉(皇陵)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금의 반대에 부닥쳐 끝내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한편으로 효종은 금을 정벌하기 위한 준비도 병행하였다. 효종이 북벌 준비의 중책을 맡긴 인물은 1161년 금 해릉왕의 남침을 저지한 명신 우윤문이었다. 1167(건도 3) 우윤문은 서방의 사천선무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군사를 조련하고 성채를 보수해 나갔다. 중앙 정부는 적극적으로 재정을 지원해 주었다. 이와 동시에 중앙에서도 군비의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윤문이 준비를 완료하고 서쪽으로부터 진군해 가면 효종도 중앙의 군대를 내어 동시에 금을 공격하기로 했다. 1172(건도 8) 9, 효종은 우윤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경이 서쪽에서 진군함에도 불구하고 짐이 머뭇거리면 그것은 짐의 책임이요, 반대로 짐이 이미 움직였는데 경이 머뭇거린다면 그것은 경의 잘못이 될 것이오.”

  하지만 당시 우윤문은 이미 회갑을 넘긴 나이였다. 그는 1174(순희 원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와 함께 효종의 북벌에 대한 의지도 기세가 꺾였다. 이후 효종은 북벌에 대한 꿈을 접고 내치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3. 효종의 내치

  남송의 정치사를 볼 때 가장 주목되는 점은 권신의 연이은 등장이다. 고종 시기에는 진회(秦檜)1138(소흥 8)부터 1155(소흥 25)까지 18년간 재상으로 있으며 전횡하였다. 녕종 초기에는 한탁주(韓侂冑)가 녕종 추대의 공훈을 바탕으로 권세를 부렸다. 녕종 후반기로부터 이종 초기까지는 사미원(史彌遠)이 무려 26년간이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송 말기에는 가사도(賈似道)17년 동안 재상으로 있으며 전횡하였다. 이들 진회한탁주사미원가사도의 행적을 쭉 이으면, 그것이 바로 남송 역사의 큰 줄거리를 이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이다.

 

 


                                                              <남송 효종의 필체>

   

  이러한 남송 시대를 통해 유일하게 권신이 보이지 않는 시기가 바로 효종의 통치기이다. 효종은 권신을 용인하기는커녕 오히려 대신들의 권한을 분산시키고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28년 동안 계속되었던 효종의 시대에 재상으로 임용된 인물은 모두 17명이다. 평균 재임 기간은 2년에 미치지 못한다. 3년 남짓한 기간에는 아예 재상이 없었다. 부재상인 참지정사의 재임 기간은 더욱 짧았다. 효종 시기 참지정사로 임용된 인물은 무려 34명에 달한다.

  효종은 측근 인사들을 이용하여 관료를 통제하였다. 여기서 측근 인사란, 효종이 황제가 되기 전 가까이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는 6살의 나이로 궁중에 들어간 이래 무려 30년 간이나 황제의 후보자 생활을 하였다. 그 만큼 효종에게는 측근이라 할만한 사람들이 많았다. 효종은 이러한 사람들을 수족처럼 부렸다.

  ≪송사<녕행전(佞幸傳)>에는 북송과 남송의 대표적 녕행 12명이 실려 있다. 녕행이란 아첨으로써 제왕의 총애를 얻은 인물을 가리킨다. 12명 가운데 효종 시대의 인물이 4명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그밖에도 효종 시대에는 녕행이라 일컬을 만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효종의 통치기를 통해 관료의 기강은 잘 바로잡혀 있었다. 효종이 뇌물 수수에 대해 엄정한 자세를 취하고, 지방관의 임용에도 신중을 기하였기 때문이다. 효종 시기 이러한 관료 사회의 기강은 남송 말기의 학자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남송의 대 유학자 진덕수(眞德秀), “효종의 통치기에 조정의 고위 관료들은 뇌물이 자기집 대문에 도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고, 지방관들은 손에 선물 꾸러미를 들고 수도로 들어가는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말하고 있다.

  효종은 농민 부담의 경감과 농업 생산력 보호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수시로 지방에 관원을 파견하여 조세 감면 조치의 시행 정황을 점검하였다. 그리하여 효종 시대는 남송 전시기 가운데 농민의 부담이 가장 가벼웠던 시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리 시설의 건설과 보수라는 측면에서도 효종 시대에는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지방지들을 살펴보면 효종 시대에 만들어지거나 혹은 보수된 수리 시설이 대단히 많다. 정치 사회적 안정과 중앙 정부의 독려를 바탕으로, 효종의 통치기에는 각지방에서 활발하게 수리 시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효종 시기의 정치 가운데 또하나 주목해야 하는 것이 회자 가치의 안정이다. 회자는 고종의 말년인 1161년에 정식으로 발행되기 시작한 지폐이다. 효종은 북송 시대의 지폐였던 사천 지방의 교자가 가치 하락으로 인해 민간에 심각한 폐해를 입혔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회자의 신용 유지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짐은 회자 때문에 걱정이 되어 거의 10년 동안이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는 회자가 발행액이 과도하지 않도록 엄격히 관리하였다. 또 이와 별도로 회자의 신용을 유지하기 위해 이따금 특별 재원을 투여하여 회자의 발행 준비금을 확충시켜 갔다.

  이러한 효종의 노력으로 회자는 정부에서 정한 가치를 잘 유지하였다. 남송 정부는 회자 1관이 동전 770문으로 통용되도록 규정하였다. 하지만 효종의 시대가 지나면서 회자는 가치는 갈수록 저하되어 갔다. 재정의 부족을 회자의 남발로 메우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효종 시대(11621189) 1관당 770문에서 750문 사이로 거래되던 것이, 1200년경에는 600문 정도로, 1210년경에는 400문 정도로, 그리고 1230년경에는 330문 정도로 저하되었다. 1260년경에는 심지어 50문 정도로까지 폭락하였다.

 

 

 


                                                    <회자의 인쇄 원판(왼쪽)과 회자>

 

 

  이러한 회자의 가치 하락은 남송 사회에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예컨대 1233년 권신 사미원이 죽고 그 뒤를 이어 민간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진덕수가 발탁되자, 그를 향해 임안의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물가의 안정을 부탁하였다. 물가의 안정이란 다름 아니라 회자의 가치 상승을 일컫는 것이다. 당시 민간에서는 이러한 여망을 담아, ‘물가를 안정시키려면, 진덕수 나리가 중용되어야만 한다네.’ 라는 노래까지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효종의 시대 태상황 고종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었을까? 그는 덕수궁에서 극히 호사스러운 방종의 나날을 보냈다. 고종은 후사로 들인 효종에게는 엄격한 도덕과 금욕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내키는 대로 향락에 탐닉한 인물이었다. 근래 중국의 어느 원로 송대사가는 그의 전기를 쓰면서 황음무도 송고종(荒淫無道 宋高宗)이란 제목을 붙이고 있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고종은 효종의 정치에도 사사건건 간섭하였다. 한 번은 고종이 효종에게 부패 혐의로 파면된 지방관의 복직을 요구하였다. 효종은 그 인물의 죄상을 낱낱이 알고 난 다음, 한 동안 고종에게 아무런 통지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고종이 크게 화를 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원상복귀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때 효종은 재상에게, ‘어제 태상황께서 어찌나 크게 화를 내시는지 짐은 몸둘 바를 몰랐소. 이쯤 되면 설령 대역 죄인이라도 풀어줄 수밖에 없겠소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왕증유 저, 황음무도 송고종의 표지>

 

 

  효종은 고종의 정치 간여와 요구를 거의 그대로 들어주었다. 고종의 사치에 대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재원도 아무 말 없이 요구하는 대로 덕수궁에 전달하였다. 효종은 고종에게 효순을 다하였다. 고종은 퇴위 이후 효종의 치세 거의 막바지까지 살다가 1187(순희 14)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맺음말

  1189(순희 16) 정월 금의 세종이 사망하고 22세의 장종(章宗)이 뒤를 이었다. 그렇게 되자 63살이 된 효종이 한참이나 나이 어린 금의 장종을 숙부라 불러야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효종은 이해 2월 퇴위하고 아들 광종(光宗)이 즉위하였다. 효종은 태상황이 되어 옛 고종의 거처였던 덕수궁을 중화궁(重和宮)이라 이름을 바꾸고 그리로 옮겼다.

  광종은 즉위 당시 나이가 43살이었다. 효종은 그가 영특하면서도 과단성이 있다 판단하고 전력을 다해 교육시켰다. 그는 광종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광종은 즉위 초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여 정치에 온 힘을 다하였다.

  하지만 광종의 황후 이씨(李氏)가 정치에 간여하고 또 부자 사이를 이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황후는 성격이 거칠었다. 어느 날 광종은 한 궁녀의 하얀 손을 보고 좋아했다. 이에 이황후는 사람을 보내 그 궁녀의 두 손을 잘라 상자에 담아서 광종에게 보냈다고 한다. 1191(소희 2)에는 광종이 궁궐 바깥으로 나가 있는 틈을 이용하여, 광종이 총애하는 황귀비(黃貴妃)를 살해하고 갑작스레 병사했다고 둘러댔다.

  광종은 이황후의 등쌀에 밀려 점차 정무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정치의 실권은 이황후의 손에 장악되었다. 이황후는 효종과 광종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렸다. ‘효종이 광종을 폐위하려 한다.’느니, 혹은 광종이 효종을 찾아가 식사를 할 때 밥에 독약을 풀어 독살하려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광종은 효종의 거처인 중화궁에 찾아가지 않게 되었다. 조정의 관료들은 광종에게 간언하여 중화궁에 가서 문안드리라고 하였다. 하지만 광종은 모두 뿌리치고 듣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1194(소희 5) 5월 효종이 와병하여 위중해졌다. 광종과 이황후는 신하들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문병하지 않았다. 6월에 효종이 68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광종과 이황후는 광종의 병을 핑계 삼아 장사 의식의 참여를 거절하였다.

  결국 조정의 대신들 사이에 광종의 퇴위와 태자의 옹립을 기도하는 모의가 일어났다. 그 중심은 태종의 후손인 조여우(趙汝愚)였다. 7월 초, 조여우는 황실 근위병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둘러싼 다음 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고종의 황후였던 태황태후 오씨의 재가를 얻어 광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녕종(寧宗)을 즉위시켰다. 이 정변의 과정에서 오태후의 조카 사위인 한탁주(韓侂冑)가 큰 역할을 하였다. 망설이는 오태후를 설득하여 정변을 추인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효종의 통치기 28년은 대외 위기와 사회 동요로 점철된 남송 시대에 깃든 짧은 평화의 시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은 효종 자신이 간택한 후계자 광종으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녕종 시대가 되면 권신 한탁주가 대금 전쟁을 추진하면서 더욱 심각한 동요가 발생하였다. 짧은 평화와 안정, 그리고 그것에 뒤이은 혼란은 효종의 통치를 더욱 인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남송의 후반기, 그러니까 13세기 중기 이후의 학자들이 효종의 시대를 동경하여 마지않았던 것도 그러한 극적인 굴절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동사> 제4호, 2012년 12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총동문회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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