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의 명장 양업(楊業)과 양가장(楊家將) 설화
머리말
1. 양업의 무공과 영웅적 최후
2. 양씨 가문(楊家)의 후예 무장들 : 양연소(楊延昭)와 양문광(楊文廣)
3. 양가장 설화의 확대와 정착
맺음말
머리말
중국인들에게 양가장 이야기(楊家將 故事)는 <삼국지>나 <수호전>, 혹은 <홍루몽> 만큼이나 친숙하다. 어렸을 때부터 동화책이나 경극(京劇), 영화, T.V. 드라마 등 다양한 경로로 접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중국인이라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서 대강의 캐릭터를 줄줄 꿰고 있을 정도이다. 우리로 친다면 <춘향전>이나 <흥부전> 정도에 비견될 수 있을까?
‘양가장(楊家將)’이란, 말 그대로 ‘양씨(楊氏) 집안의 장수들’이란 뜻이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장수들은 비단 남자로 국한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남성 장수들로 이야기가 꾸려지다가, 후반부에 진입하면 오히려 남자들보다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후반부의 양씨 집안 남자 장수들은 여성 장수에게 맥을 추지 못하고 패배한다. 이런 여성들이 양씨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와 혁혁한 무공을 세우는 것이다.
이야기 속의 양씨 집안 무장들은 모두 합하여 수십 명에 달한다.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다시 손자로, 또 그 아래로 이어져 총 5대에 이른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인간적이고 다정다감하며, 불의에 참지 못하는 의협심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다. 남녀를 불문코 대부분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다. 여성 무장들의 경우는 거의 대단한 미모에 명확한 사리분별력, 그리고 탁월한 무예까지 겸비하고 있다. 이야기는 주로 충성과 효성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여기에 남녀 간 사랑과 로맨티시즘, 그리고 우정과 의리도 덧붙여져 있다. 다소 허황한 마법과 도술도 등장한다.
중국인들은 극한 악조건을 이기고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양씨 집안 출신 영웅들의 활약에 열광하며 빠져들었다. 양씨 집안의 영웅들은, 그들을 해코지하는 간신배와 매국노의 모략을 알고 때로 그것에 걸려들면서도 나라를 위해 온 몸을 바친다. 그들의 활약으로 나라(宋朝)는 외침이 거듭되는 위기에서 어렵사리,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통쾌하게 일어설 수 있게 된다.
양가장 이야기가 완전한 허구는 아니다. 북송시대에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기에 ‘옛 이야기(故事)’라 불리는 것이다. 북송초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양업(楊業), 그리고 그 아들인 양연소(楊延昭)와 손자 양문광(楊文廣)이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애초 양씨 가문 3대에 걸친 역사가, 이야기 속에서는 5대 수십 명의 영웅담으로 변모한 것이다. 또 문학적 재구성을 통해, 역사 인물들의 행적도 다소 간 변형되고 또 영웅적으로 각색되었다. 때로 각 인물 사이의 관계까지 왜곡되기도 했다.
양가장 이야기가 중국인들 사이에 각광을 받으며 널리 퍼진 것은 청대 중엽의 일이었다. 청대가 되면 중국 각처에 다양한 형태의 유희와 민간 예술이 발달했다. 그 중에서도 경극(京劇)이야말로 양가장 이야기를 민간에 확산시킨 주된 장르였다. 경극 및 그 지방적 변형물인 지방극은 양가장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각색시켜 공연하였다. 양가장 이야기 속의 무용담과 의리, 영웅적 구국, 그리고 로맨스에 민중은 환호하였다. 이후 양가장, 즉 양씨 집안의 무장들은 그 어느 영웅보다도 민중에게 친숙하고 또 사랑을 받는 캐릭터가 되었다. 오늘날 양가장 이야기가 중국과 대만, 홍콩 등지에서, 영화와 T.V. 그리고 각종 예술 작품의 소재로 부단히 이용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민중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가장 이야기는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일까? 역사적 사실과 양가장 이야기는 어떻게 다를까? 양씨 가문 무장들의 어떠한 모습이 민중들에게 감동을 주어 양가장 이야기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일까? 또 양가장 이야기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이 민중의 사랑을 받게 되었던 것일까? 이 글에서는 이러한 것들에 초점을 맞추어, 양가장 이야기의 정착 과정을 평이하게 서술해 보고자 한다.
1. 양업(楊業)의 무공과 영웅적 최후
양가장 이야기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양업이다. 그의 영웅적 활약과 비극적 최후가 있었기에 양가장 이야기가 중국의 민중에게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다. 양가장 이야기 속에서도 그는 양씨 가문의 전통을 닦은 사람이자 정신적 지주로 묘사되고 있다.
양업은 930년경 산시(山西)의 인주(麟州)에서 태어났다. 930년경이라 하면 중국 역사상 마지막 분열기인 오대(五代)의 한 복판이다. 이 무렵 화북의 북부에서는 거란과 한족 정권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그가 태어난 산시의 인주 일대는 거란의 압박에다가 서쪽 이민족의 침공이 더해져 극히 복잡다단한 정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양업의 부친은 양신(楊信)이란 인물이었다. 양신은 양업이 성장하여 소년이 되었을 때 오대 정권의 하나인 후한(後漢)으로부터 인주자사(麟州刺史)에 임명되었다. 양가장 이야기에서 양신은 ‘화산왕(火山王) 양곤(楊滾)’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인주는 산시에서도 가장 서북 쪽에 치우친 지방으로서 화산지대였기 때문이다. 양신은 ‘화산왕’이란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 인주 일대의 토호였다. 양씨는 대대로 이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양신은 아들인 양업이 장성하자 그를 산시 지방의 유력자 유숭(劉崇)에게 보내 섬기게 했다. 유숭은 후한 왕조를 창건한 유지원(劉知遠)의 동생이었다. 그는 양업을 보고 그 사람됨이 몹시 마음에 들었던지, 양업에게 자신의 성이자 황실의 성씨인 유씨를 내려주고 이름도 계업(繼業)이라 고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951년 후한 정권이 멸망하고 오대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後周)가 들어섰다. 그러자 후한의 종실인 유숭은 후주에의 복속을 거부하고 자기 지배하의 산시 지방에 새로운 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십국(十國)의 하나인 북한(北漢)이다. 유숭의 휘하에 있었던 양업도 자연스레 북한의 신하가 되었다. 북한은 후주의 뒤를 이어 송이 들어선 다음에도 한동안 존속하다 979년에야 송에 의해 멸망된다.
그런데 이때 조금 이상야릇한 일이 벌어진다. 후주가 들어섰을 때 양신은 아들 양업과 다른 편인 후주에 항복하였던 것이다. 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정권으로 갈라서게 된 것일까? 그런데 이상한 일은 또 벌어진다. 양신은 얼마 후 사망하고 다른 아들인 양중훈(楊重訓)이 뒤를 이었는데, 양중훈은 곧바로 북한에 투항해 버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후주로 되돌아갔다. 왜 이렇게 양씨 가문 사람들은 이리저리 갈려서 갈팡질팡했던 것일까?
이는 양씨 가문이 살고 있었던 인주란 지역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인주는 당시 가장 서북방에 치우친 지역으로서 이곳에는 여러 이민족들의 침략이 거듭되고 있었다. 양씨 가문은 이러한 침략으로부터 영역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유력한 후견인을 찾아 나섰고, 이러한 노력이 후주와 북한 사이의 관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양신이 일찍이 양업을 지역 유력자인 유숭에게 보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취해진 조치라 보여진다.
양업은 장성한 후 이웃 지방인 부주(府州)의 토호 절씨(折氏) 집안의 여인과 결혼하였다. 양업의 부인 절씨는 양가장 이야기 속에서 사태군(佘太君)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사(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절(折)의 잘못이다. 양씨 가문은 필요에 따라 이웃 지방의 유력자인 절씨와 동맹하는 관계였다. 그런 의미에서 양업과 절씨의 혼인은 일종의 정략결혼이었던 셈이다. 양업의 부인 절씨는 매우 총명하면서도 기민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양업이 전공을 세우는 과정에서도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한다. 양가장 이야기에서 나오는 사태군의 의연하고 단호한 역할은 실제의 모습을 상당 부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북한 정권에 몸담고 있으며 양업은 눈부신 전공을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승진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활약으로 그의 용맹함은 널리 퍼져 갔으며 관직은 절도사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활약에 대해 당시의 기록에서는, “이르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사람들이 ‘양무적(楊無敵)’이라 불렀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그의 명성은 북한과 대립하고 있던 송측에도 알려질 정도였다. ‘양무적’이란 말은 양가장 이야기에서도 그대로 답습된다.
북한이란 정권은 후주의 후한 멸망에 반발하여 수립된 정권이었다. 그래서 후주 시기는 물론이려니와 후주의 뒤를 이어 들어선 송과도 시종일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반면 북방의 거란에 대해서는 북한의 황제가 ‘아들’이라 자칭하며 극히 우호적이면서도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그렇다면 북한의 양업이 세운 전공은 어떤 나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을까? 북한이 전 시기를 통해 주로 싸웠던 나라는 후주와 송이었다. 그런 만큼 무장인 양업이 군대를 이끌고 전투하였던 주대상 역시 마찬가지로 후주와 송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기록에는 양업이 송이나 후주과 더불어 접전하였다는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송과 대결할 때도 송과의 접전 사실은 외면한 채 북한의 황제에게 송조에 대한 항복을 권유했다는 사실만이 적혀 있을 뿐이다. 이는 어찌 보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된다. 송조의 입장에서 양업은 훗날 죽음으로써 국가를 지키려 한 충신이다. 송대의 사대부들에게 그러한 양업이 비록 북한에 몸담고 있을 때의 일이지만 한때 송조와 대적하였다는 사실은 여러 이유에서 기피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북한이 송에 의해 멸망한 것은 979년(太宗 太平興國 4년)의 일이었다. 북한은 10국 정권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송에게 있어 북한의 정복은,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중국의 통일 사업을 완성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송 태종은 북한의 멸망 이전부터 양업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송 태종은 유능한 무장인 양업을 어떻게든 자신의 신하로 삼고 싶어서, 그의 생포를 위해 큰 포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북한이 멸망한 직후 태종은 특별히 환관을 보내 양업을 맞아오게 했다. 양업이 살아서 투항한 것을 보고 그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우령군위대장군(右領軍衛大將軍)이란 직위에 임명하였다. 이후 양업은 태종의 신임을 받으며 신속하게 승진을 거듭하였다. 태종의 신임은, 밀봉한 보따리에 하사품을 담아 직접 본인에게 전달하게 할 정도로 두터웠다고 한다.
양업이 송에 항복한 이듬해(980년), 거란과의 사이에 전투가 발생했고 이때 양업은 그 출중한 능력을 여실히 입증하였다. 거란은 안문관(雁門關)을 넘어 만리장성 이남 지역인 대주(代州)에 침공하였다. 당시 양업은 대주의 무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그는 휘하의 기병 수천을 이끌고 사잇길을 통해 배후로 돌아 거란을 급습하였다. 배후의 습격을 전연 예측하지 못하고 있던 거란의 군대는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다 대패를 당했다. 이렇게 참담한 패배를 당한 거란은 이후 양업 군대의 기치만 봐도 도망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 공로로 양업은 운주관찰사(雲州觀察使) 겸 판대주(判代州)로 승진하였다. 판대주라 하면 대주의 지방장관직을 말한다. 적군의 장수로서 항복한지 불과 1년만에 파격적인 승진을 이루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승진은 시새움도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지녔고 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해도 그는 항복한 장수였다. 변경의 고위 관료들은 비밀리에 조정으로 투서하여 그의 잘못을 헐뜯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업에 대한 신임이 두터운 태종은 모두 불문에 부치고, 심지어 그런 투서를 양업에게 내려 보내기도 했다.
이런 정황이 지속되고 있던 무렵인 986년(태종 雍熙 3년), 송과 거란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터졌다. 이른 바 ‘옹희 북벌’이라고 일컬어지는 전쟁이 그것이다. 그 한 해 전 거란에서는 경종(景宗)이 죽고 뒤를 이어 나이 어린 성종(聖宗)이 즉위하였다. 송의 태종은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숙원 사업인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의 수복을 이뤄 내고자 했던 것이다.
986년 3월 송의 원정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진격을 시작했다. 조빈(曹彬)이 지휘하는 동로군(東路軍)은 하북동로(河北東路)의 웅주(雄州)로부터 북상하고, 전중진(田重進)이 지휘하는 중로군(中路軍)은 하북서로(河北西路)에서 비호(飛狐) 방면으로 진격했으며, 반미(潘美)가 이끄는 서로군(西路軍)은 하동로(河東路) 대주(代州)의 안문관(雁門關)으로부터 북진하게 했다. 이 가운데 양업은 서로군, 즉 반미 부대의 예하로 편성되었다.
송 군대의 진격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전중진과 반미의 부대는 서전에서 승리를 거듭하였다. 반미는 운주(雲州)ㆍ응주(應州)ㆍ환주(寰州)ㆍ삭주(朔州) 등을 점령하고 전중진은 비호(飛狐)ㆍ영구(靈邱)ㆍ울주(蔚州) 등을 점령하였다. 조빈의 군대도 신속하게 북진을 거듭하였다. 그 진격의 속도는 너무 빨라서, 보고를 받는 태종이 놀라서 불안을 느낄 정도였다. 이렇게 쾌속 진군을 거듭하던 송의 군대는 진격 개시 2달만인 986년 5월, 기구관(歧溝關)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만다.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전군에 진격을 중단하고 후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양업이 속한 반미의 부대는 승전을 거듭하며 상건하(桑乾河)까지 북상한 상태였다. 반미는 태종의 후퇴 명령을 받고 남하하여 대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반미가 너무 서둘러 남하하는 통에 문제가 생겼다. 운주ㆍ응주ㆍ환주ㆍ삭주 방면으로부터 송의 군대를 따라 남으로 내려오고자 하는 백성들이 미처 뒤따르지 못하고 노상에서 우왕좌왕하게 된 것이다. 태종은 반미에게 이들 백성을 챙겨서 안전하게 남하하도록 도우라 명령하였다.
반미의 부대는 심히 어려운 국면에 봉착하였다. 당시 거란의 군대는 환주를 탈환하고 안문관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반미 부대 내에서는 향후의 전략을 둘러싸고 논의가 진행되었다. 양업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현재 거란의 군대는 기세가 높아 정면으로 대결해서는 안 됩니다. 조정에서도 4주 주민의 안전한 구출만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란과의 결전을 피하고 우회 전술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 군대를 이리저리 이동시킴으로써 적에게 혼란을 주면서 운주와 응주, 삭주 등의 백성을 차례로 대피시키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러한 양업의 주장에 대해, 감독관으로 파견되어 왔던 관료 왕신(王侁)이 반대하였다.
“수 만 명의 정병을 이끌고 이렇게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요. 북을 울리며 당당히 진군해야 합니다.”
곁에 있던 또다른 감독관 유문유(劉文裕)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자 양업이 말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지고 말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왕신이 빈정대었다.
“그대는 평소 무적이란 평판이 자자했는데 지금 보니 적 앞에서 몸만 사리고 있군요. 그렇게 적을 피하며 싸우려 들지 않는 데에는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오?”
왕신의 말은 북한으로부터 항복한 장수인 양업에게 대단히 자극적인 공박이었다. 양업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는 유리할 때가 있고 불리할 때가 있습니다. 부질없이 부하 장병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나한테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말씀하시니 내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양업은 이렇게 하여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출정을 앞두고 사령관인 반미를 찾아가 울면서 하소연했다.
“저는 북한에서 항복한 사람입니다. 죽어야 마땅하지만 폐하께서 은혜를 베풀어 장수에 임명해 주셨습니다. 어찌 제 한 몸의 안전만 엿볼 리 있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이 저에게 적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니, 제가 앞서 나가서 적과 싸우다 죽겠습니다.”
그리고 진가곡(陳家谷)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 군대를 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싸우다가 후퇴하여 이곳에 이르면 군대를 풀어 구원해 주십시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제 부대원 전체가 몰살될 것입니다.”
반미는 양업의 말대로 진가곡에 원군을 배치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참이 지나도록 양업의 군대는 당도하지 않았다. 반미는 기다리다 지쳐, ‘양업이 승리했나 보다’ 하고 판단하고는 군대를 철수시켜 버렸다. 그 후 해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양업의 군대는 진가곡에 이르렀다. 하지만 약속했던 지원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양업과 부대원은 화살이 다 떨어지자 맨 손으로 적군에 맞섰다. 이렇게 양업의 군대는 이곳에서 몰살되었다. 양업의 맏아들 양연옥(楊延玉)도 여기서 죽었다. 양업은 부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거란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이후 사흘 간 먹지 않고 버티다가 굶어 죽었다.
양업은 뛰어난 지략을 가진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부하 장수들의 고충을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훈련할 때면 부하들과 더불어 똑같이 고생하였다. 옹희 북벌 때에도 북으로 진군하여 주둔하고 있는데 추위가 엄습해 오자, 그는 부하 장수들 곁에서 똑같은 상태로 밤을 지새움으로써 휘하 병사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아랫사람들을 아끼고 이해해 주었기에 부하 장수들이 마음 속으로부터 따랐던 것이다.
진가곡의 전투는 양가장 이야기 속에서 ‘금사탄(金沙灘)의 혈전’이라 불린다. 하지만 전투의 전후 경위는 변형되어, 거란의 소황후(蕭皇后)가 계략으로 송 태종을 불러들여 포위하자 양업이 출동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황제 태종의 포위라는 절체절명의 순간, 일신의 안위를 따지지 않고 양업과 그 아들들이 나서는 것이다. 금사탄의 혈전은 양가장 이야기 가운데 가장 처절한 전투 장면이다. 여기서 양업, 그리고 그의 아들 일곱 중에서 3명이 전사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양업의 죽음도 더욱 비장하게 변모시켜, 사흘간의 단식에도 죽지 않자 비석에 머리를 찧어 자살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금사탄의 혈전은 때로 이 부분만 떼내어져 단독으로 작품화되기도 한다.
2. 양씨 가문(楊家)의 후예 무장들 : 양연소(楊延昭)와 양문광(楊文廣)
양업에게는 슬하에 아들 일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진가곡 전투에서 전사한 맏아들 연옥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이 양업의 사후 관원으로 발탁되었다. 남은 여섯 아들 중 부친 양업의 뒤를 이어 무장으로 이름을 떨치는 인물이 바로 양연소(楊延昭)이다. 양연소는 양가장 이야기에서 양육랑(楊六郞)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양업의 여섯 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양연소는 어렸을 적부터 조용하고 말이 없는 아이었다. 하지만 군대의 진영을 펼치며 놀기 좋아해서, 아버지 양업은 “이 아이가 나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양업은 양연소가 장성하자 군사적 재질이 있는 그를 전장에 데리고 다녔다. 옹희 북벌 때도 공봉관(供奉官)이 되어 양업과 함께 전장을 누볐다. 응주와 삭주를 공격할 때는 선봉에 섰다. 하지만 삭주성 전투에서 흐르는 화살이 어깨를 관통하는 바람에 진가곡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고 그래서 살아남았던 것이다.
986년 진가곡 전투로 양업이 사망한 후 양연소는 숭의부사(崇儀副使)로 승진하여 지경주(知景州)가 되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숭의사(崇儀使)를 거쳐 보주연변도순검사(保州緣邊都巡檢使)가 되었다. 도순검사라 하면 휘하에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린 종5품의 직위로서 무장으로서는 상당한 고위직이었다. 또 보주(保州)는 하북서로의 최북단으로서 거란과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었다. 보주연변도순검사는 휘하에 상당한 병력을 거느리며 최전선에서 거란의 군대와 대치하는 직책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양연소가 도순검사로 근무하고 있던 999년(眞宗 咸平 2년) 겨울, 거란의 군대가 대거 보주 방면으로 남침하였다. 이때의 전투에서 양연소는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당시 양연소는 보주 바로 동쪽의 광신군(廣信軍) 수성(遂城)에 있었다. 광신군의 수성도 보주와 마찬가지로 거란과 접경한 곳이었지만 성이 작고 방비가 허술했기 때문에, 거란의 드센 공격 앞에 침몰 직전의 난파선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거란 군대의 포위는 며칠이나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황에서 양연소는 성내 주민과 군대를 다독거리며 아주 효과적으로 적군의 침공을 막아냈다. 추운 날씨가 계속되자 양연소는 물을 길어 성벽에 뿌리도록 했다. 적군은 물이 얼어 붙어 성벽을 타고 오를 수 없었다. 결국 거란은 자그마한 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양연소는 퇴각하는 거란의 군대를 추격하여 많은 무기를 노회했다. 이러한 승리 소식을 접한 진종은 주변 사람에게, “연소의 부친인 양업은 전대의 명장이었는데, 연소가 그 유풍을 이어받았으니 심히 기쁜 일이로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일단 퇴각했던 거란은 얼마 후 다시 진격해 왔다. 이에 양연소는 복병을 매설하고 짐짓 퇴각하였다가 역습하는 전술로 거란군을 대파하였다.
999년의 전투에 대해 양가장 이야기에서는, 황제 진종이 간신 왕흠(王欽)의 꼬임에 넘어가 북방의 대명부(大名府)에 갔다가 거란의 군대에 포위되는 것으로 바뀌어 진다. 곤경에 처한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양연소를 위시한 양씨 집안 사람들이 대거 출동하는데, 여기에는 사태군과 두 딸도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양연소가 병권을 장악하고 거란의 군대를 대파함으로써 사태는 종결되기에 이른다. 이때 등장하는 간신 왕흠은 실제 존재했던 인물인 왕흠약(王欽若)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런데 송대의 재상 왕흠약을, 양가장 이야기에서는 거란의 소황후가 송조를 내부에서 교란시키기 위해 파견한 첩자였다고 그리고 있다.
양연소는 999년 두 차례에 걸친 혁혁한 전공으로 자사(刺史)를 거쳐 단련사(團練使)로 승진하였다. 그에게 단련사의 직위를 내리면서 진종은, “양연소는 유력 가문 출신이 아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또 조정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짐이 힘껏 보호하여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양연소의 부친 양업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북한이라는 적국에서 항복해온 무장이었다. 또 양업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사대부 사회인 송대에 이러한 면모는 중대한 약점이었다. ‘출신이 좋지 않았다.’는 진종의 지적은 그런 내력을 말하는 것이다. 또 그렇기에 양업이나 양연소가 급작스럽게 승진하는 것에 대해 시기하고 질시하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
양업ㆍ양연소 부자가 지니고 있던 걸출한 능력과 그 주변의 견제하고 시기하는 사람들, 그리고 부친 양업의 비극적인 최후…… 양업ㆍ양연소 부자는 민중들로부터 애호될 수 있는 영웅적 요소를 두루 구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가장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요소가 더욱 과장되고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게 된다.
하지만 역사상의 실제 인물인 양연소가 언제나 전투 과정에서 눈부신 성공만을 거둔 것은 아니다. 1002년(진종 함평 5년) 거란이 재차 보주를 침공해 왔을 때, 양연소는 채 준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급습을 받아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패배로 양연소는 단련사 직위에서 내쫒기고 처벌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진종의 보호로 간신히 처벌만은 면했다. 그러다 이듬해(1003년) 대신 파견된 장수가 다시 거란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그는 이전의 직책에 복귀하였다.
양연소가 거란과의 전투에서 다시 전공을 수립하는 것은 유명한 전연의 맹약 시기의 일이다. 1004년(眞宗 景德 원년) 거란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송을 위협하였다. 이때의 남침은 이전까지 변경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전투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거란의 군대는 황제 성종(聖宗)과 소태후(蕭太后)가 친히 대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거란의 침공 소식에 접한 송의 조정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일부 대신들은 멀리 남쪽의 금릉(金陵, 오늘날의 南京)이나 청두(成都)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송조는 재상 구준 (寇準)의 주도로 남침해 오는 거란의 군대에 맞서 진종이 친정을 감행하고, 거란의 군대와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태에서 거란측과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강화조약은 이후 그 체결 지점의 이름을 따서 ‘전연(澶淵)의 맹’이라 불리게 된다.
양연소는 전쟁이 폭발했을 때 근무지인 보주(保州) 일대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조정의 굴욕적인 강화 조약 체결 움직임에 반대하며 시종 강경한 전면 공격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황하 인근의 전주(澶州)에서 송과 거란 사이 군사적 대치가 지속될 때 군대를 이끌고 요 영역을 침공하였다. 이러한 배후 지역에 대한 공격은 거란 군대를 매우 당황하게 만들었다.
1004년 전연의 맹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잘 알려져 있듯 송과 거란 사이에 다시 전쟁이 폭발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양연소는 변경지역에서 장수로 근무하였으나 사실상 지방관의 역할을 하다 1014년(眞宗 大中祥符 7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진종은 특별히 환관을 사자로 파견하여 애도를 표명하였다. 하북 일대의 주민들도 그의 상여가 지나자 멀리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양연소도 부친 양업과 마찬가지로 부하 장병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다. 아랫사람을 아끼며 고락을 같이 하는 것도 부친과 똑 같았다. 그렇기에 부하 장병들이 양연소를 믿고 신뢰하였고, 이로 인해 거란과의 접전시 양연소 부대는 놀라운 전투력으로 연이어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변경에서 장수로 근무하던 20여년 간, 거란은 두려워하며 그를 두고 ‘양육랑(楊六郞)’이라 불렀다고 한다. 양가장이란 지칭, 즉 양씨 집안의 무장들이란 용어의 연원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양연소의 뒤를 이어 양씨 집안의 전통을 이어간 인물은 양연소의 셋째 아들 양문광(楊文廣)이다. 그는 양가장 이야기 속에서 양업이나 양연소보다 오히려 훨씬 뛰어난 활약을 보이나, 무장으로서의 실제 활동은 그들에게 훨씬 뒤졌다. 따라서 현존하는 기록의 양도 매우 적다. <송사>의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분량도, 대략 양업에 비교하면 5분의 1, 양연소에 비하면 4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양문광이 살아간 시대는 전연의 맹약이 체결된 이후였다. 따라서 그가 무장으로서 전투를 벌인 대상도 조부인 양업이나 부친 양연소와 달랐다. 양업과 양연소는 시종 거란과 전투를 벌인 반면, 그는 남북으로 반란 진압을 위해 활동한 것을 제외하면 주로 서하와 싸웠다.
이러한 양문광의 행적은 그대로 송대 대외관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전연의 맹약 이후 잦아들던 대외 전쟁의 위기는, 10세기 중엽 서방의 탕구트족이 발흥하면서 다시 크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후 송조는 총력을 다해 탕구트족의 서하와 전쟁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서하와의 전쟁은 송대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장기간에 걸쳐 전쟁을 지속하며 재정 부담이 커져서 점차 송조 권력은 걷잡을 수 없는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어 갔기 때문이다. 서하와의 강화조약이 체결된 이후 송조 내부에서 개혁의 목소리가 커지고, 그것이 마침내 왕안석의 개혁으로 이어지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양문광의 행적으로서 <송사>의 열전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 맨 처음으로는 산시(陝西) 지방에서 발생한 장해(張海)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전직(殿直)의 관직을 수여받았다는 사실이 나온다. 두 번 째 행적으로는 범중엄(范仲淹)이 산시의 선무사로 파견돼 왔을 때 그와 대화를 나눈 다음 그 능력을 인정하여 휘하로 불러 들였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 셋째로, 광시(廣西) 지방에서 농지고(儂智高)의 반란이 일어나자 적청(狄靑)을 따라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고 한다. 넷째로는, 영종(英宗) 시대 궁중의 경비를 담당하는 숙위장(宿衛將)의 인선이 논의될 때, 명장의 후손인 그를 변경 지방의 방어 책임자로 발탁하였다는 것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하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이 조금 길게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첫째로부터 넷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각각 한자로 단 10여 글자 씩으로서, 모두 합해 봐야 수십 자에 지나지 않는다.
양문광이 관직에 나서는 계기가 된 것은 장해의 반란 진압이었다. 이 반란은 1043년(仁宗 慶曆 3년)에 발생한 것이었다. 이때 양문광에게 수여되었다는 전직은 정9품의 최하급 무직이다. 당시 양문광의 나이는 아마도 44살 전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중년의 나이에 무장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범중엄이 산시의 선무사로 파견된 것은 그 이듬해인 1044년의 일이었다. 당시 송조는 서하와 한창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범중엄은 서하 전쟁의 해결이라는 임무를 띠고 특파된 상태였다. 따라서 양문광이 범중엄과 대화한 내용도 서하 전쟁과 관련한 전략이었을 것이고, 그것이 범중엄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농지고 반란의 진압은 양문광이 고위 관직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농지고의 난은 1052년(인종 皇祐 4년) 베트남과의 접경지역인 광시(廣西)에서 발생한 소수민족의 반란이었다. 이 반란 진압의 주역은 추밀부사(樞密副使) 적청이었다. 적청은 군대를 이끌고 내려가 반란 진압에 나선 지 불과 10일만에 완전히 토벌해 버렸다. 양문광은 적청 휘하의 부장으로서 공을 세워 덕순군(德順軍) 지군(知軍) 겸 광서검할(廣西鈐轄)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는 의주(宜州)의 지주를 거처 광서로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옹주(邕州)의 지주가 되었다.
양문광은 비록 무장으로서의 업적이란 면에서는 조부인 양업이나 부친인 양연소에 현격히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관직의 지위는 훗날 보군도우후(步軍都虞候)에까지 이르렀다. 보군도우후는 중앙 금군의 최고 무관 가운데 하나이다. 일부 학자는 양업과 양연소 등의 명성이 높아진 것도 어쩌면 양문광 때문일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양가장 이야기에서는 농지고의 반란 진압에서의 역할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다. 양가장 이야기에서 농지고의 반란을 진압하는 주역은 양연소의 아들인 양종보(楊宗保)이다. 그는 당시 고령의 나이였지만 양씨 가문의 자녀들을 이끌고 출정하여 멋지게 승리를 거둔다. 여기서 적청은 양종보에 앞서 반란 진압을 위해 파견되었지만 실패를 거듭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리고 양종보가 나가서 공을 세우자, 이후 사사건건 양가의 무장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악역이 된다.
양문광이 세운 무공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송사> 열전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서하와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였다. 그는 1060년대 중반 서하와의 접경 지역에 배치되었다. 당시 명신인 한기(韓琦)가 중앙으로부터 이 지역의 고위 관료로 파견되어 있었다. 한기는 양문광에게 성채의 신속한 구축을 명령하였고, 양문광은 이를 받들어 서둘러 공사에 착수하였다. 성채의 건설은 오후 무렵에 대략적으로 완성되었다. 그 이튿날 서하의 기병이 대거 침략해 왔으나, 양문광 부대는 새로 건설한 성채에 의거하며 방어에 성공하였다. 서하의 군대는 빈손으로 돌아가며, “우리 국왕에게 아뢰어 수만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 오겠다.”고 말했다. 양문광은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다시 대파하였다고 한다.
이후 양문광은 각지의 지방관으로 전전하다가 마침내 관직이 보군도우후에까지 올랐다. 그는 1074년(신종 熙寧 7년) 대략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송대 양씨 가문 무장들의 활동은 양문광을 끝으로 종료된다. 하지만 양가장 이야기는 이후로도, 3대 양종보와 4대 양문광을 거쳐 5대 양회옥(楊懷玉)으로 계속된다.
양가장 이야기에서 양문광은 2대 양연소의 손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역사 인물 양문광의 실제 활동을 담고 있는 인물은 3대 양종보로 되어 있다. 앞서 양가장 이야기는 문학적 창작 과정에서 실제 인물의 행적을 많이 변형시켰다고 말한 바 있다. 3대 양종보와 4대 양문광은 그러한 변형과 왜곡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3. 양가장(楊家將) 설화의 확대와 정착
1장과 2장을 통해서는 양가장 이야기의 소재이자 토대라 할 수 있는 역사 인물 양업과 양연소, 양문광의 활동과 전공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들의 실제 행적이 양가장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었는지에 대해, 진가곡 전투와 대명부 전투, 그리고 농지고 반란의 진압 등을 사례로 하여 알아 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양가장 이야기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이 민중 속에 유포되어 갔는지 서술해 가기로 한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여가석(余嘉錫)은 양가장 이야기의 출현 과정에 대해, ‘북송 시기에는 양씨 집안 무장들의 이름이 저명하지 않았다. 민간에서 이들의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남송시기였다. 남송시대 백성들이 이민족의 침략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자 북송 태종시기의 국세 팽창기를 그리워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양업 부자의 행적이 사람들 사이에 얘기되어 지며 전파되어 갔다.’고 말한 바 있다. 여가석의 연구는 1940년대에 발표된 것이지만, 양가장 이야기에 대한 선구적 연구업적이자 오늘날까지도 그 내용은 대부분 정설과 같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가석에 의하면, 양가장 이야기는 남송시대 이래 지속된 외환의 위기 속에서 민중들이 외적 격퇴의 영웅인 양씨 가문의 명장들을 찬미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양가장 이야기가 외적과의 전투와 통쾌한 승리를 줄거리로 하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양업과 양연소, 양문광의 주요 공적도 거란과 서하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남송 시대 이후 중국인들이 양가장 이야기에 빠져든 것은, 분명 여가석이 지적한 대로 이민족 격퇴의 영웅들을 통해 추상적 만족을 구한 결과라 할 것이다. 남송 이후 원, 청으로 이어지는 이민족 침략의 시기에 양가장 이야기의 확산과 발전이 심화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구조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이외에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양업과 양연소 등이 민중들의 정서에 부합하는 비극적 영웅의 면모를 두루 갖추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양가장 이야기가 민간에 유포되기 시작한 시점에 대해 여가석은 남송시대라고 말했지만, 실은 북송 중엽에 이미 그 단초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1051년에 쓰여진 대문호 구양수(歐陽脩)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구양수는, “양업과 양연소 부자는 모두 명장으로서 ‘무적’이라 일컬어졌다. 지금 천하의 사람들은 위로 사대부로부터 아래로 마을의 아이와 시골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을 모두 알고 있다.”고 적고 있다. 1051년이라면 양문광이 생존한 시점이다. 이때 이미 양업과 양연소 부자의 이름은 중국인 모두가 알고 있다 할 정도로 매우 널리 전파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송시대가 되면 양씨 집안 무장들, 양가장에 대한 문학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현존하는 송대의 화본(話本)과 금 원본(院本)의 제목 가운데 양가장 이야기와 관련된 것이 적지 않다. <양영공(楊令公)> <오랑위승(五郞爲僧)> 등이 그것이다. 양영공은 양업의 별명으로서, 사후 그에게 태위(太尉)ㆍ중서령(中書令)이 추증되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영공(令公)은 중서령의 존칭이다. 오랑이란 양업의 다섯 째 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랑은 양가장 이야기에서 금사탄의 대혈전 때 거란군에게 쫓겨 오대산으로 들어갔다가 승려가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이후 양가장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혜성처럼 등장하여 구해주는 역할을 한다. <오랑위승(五郞爲僧)>은 오늘날 양가장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오랑의 원형이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 금의 원본 중에는 <타왕추밀찬(打王樞密爨)>이란 제목이 남아 있다. 왕추밀은 진종 시기에 추밀사와 재상을 역임하는 왕흠약을 가리킨다. 양가장 이야기에서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거란으로부터 송에 밀파된 첩자로 그려져 있다. 그는 송에 도착한 이래 교활한 수단으로 추밀사 직위에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타왕추밀찬(打王樞密爨)>이란 원본 역시 아마 이러한 줄거리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남송과 금 시대가 되면 이미 양가장 이야기는 이야기꾼(說話人) 및 구란(句欄)의 예능인들 사이에 자주 공연되는 레파토리의 하나로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양가장 이야기는 점차 역사적 사실과 상당한 거리를 지니는 내용으로 발전해 갔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한인의 입장에서 거란을 배척하고 격파하는 구도를 띠고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아울러 남송말 단계에 이르면 ‘양가장’이란 명칭도 출현하게 된다. 현존하는 기록 가운데 ‘양가장’이란 용어가 사용된 최초의 사례는 남송말 원초의 인물인 서대작(徐大綽)의 <신여록(燼餘錄)>이다. 이 책에는 양가장의 행적이 양업으로부터 양연소, 양문광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 가운데 양업과 관련하여, “태평흥국 5년(980) 태종은 양업의 엄호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양업 및 여러 아들이 분투하여 태종을 사지에서 구했다.” 고 적고 있다. 980년 양업이 태종을 사지에서 구해냈던 적은 없다. 또 <신여록>의 기록에는 양업의 아들 이름에 상당한 혼란과 착오가 있다. 이러한 허구 내지 사실 왜곡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화본에 근거하였기에 발생한 것이라 판단된다.
원대에는 서민 문화가 한층 발달하였다. 잡극과 각종 민간 예능도 민중 사이에 널리 유포되어 갔다. 현존하는 원대의 잡극 극본 가운데 양가장 이야기와 관련된 것은 <오천탑맹랑도골(吳天塔孟良盜骨)> 및 <사금오사절청풍부(謝金吾詐折淸風府)> 두 가지다. 이밖에도 적지 않은 극본의 제목이 남아 있으나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오천탑맹랑도골>과 <사금오사절청풍부>는 지금의 양가장 이야기와 거의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오천탑맹랑도골>는 육랑(六郞), 즉 양연소가 아버지인 영공(令公, 楊業)의 유골을 회수하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어느 날 영공이 육랑의 꿈에 나타난다. 자신이 비석에 머리를 부딪쳐 죽은 후, 반인미(潘仁美)가 그 유골을 모아 유주(幽州) 호천사(昊天寺)의 탑에 매달아 두고 매일 100명의 병사로 하여금 활로 쏘아 맞추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반인미는 백전회(百箭會)라 부르는데, 이로 인해 매일 자신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육랑은 부하 맹랑(孟郞)과 함께 호천사에 가서 영공의 유골을 구해내 태종에게 바친다. 육랑은 유주로부터 돌아오는 도중 오대산에서 우연히 승려가 되어 있던 오랑(五郞)과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금오사절청풍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거란의 실권자 소태후는 심복 하려아(賀驢兒)를 왕흠약(王欽若)으로 변신시켜 송조로 잠입하게 한다. 소태후는 하려아를 보내며 그가 배반할까 두려워 발목에다가 문신을 새겼다. ‘하려아’라는 본명과 ‘절대 거란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왕흠약은 이후 승진하여 송조의 추밀사로 활동한다. 그런데 당시 육랑이 국경을 지키고 있어 거란은 도저히 송을 공격할 수 없었다. 왕흠약은 사위인 사금오(謝金吾)를 시켜 황제의 지시를 조작, 양씨 가문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사태군이 이 사실을 육랑에게 전하고, 육랑은 부하 초찬(焦贊)과 함께 근무지인 국경지대를 이탈하여 수도에 들어왔다. 이후 초찬이 사금오 일가를 몰살시키는 바람에, 육랑과 초찬은 왕흠약에게 잡혀서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맹랑(孟郞)이 조정에 와서 거란의 음모를 보고하고, 진종은 왕흠약의 다리를 친히 조사한다. 그리고 하려아 등의 글자를 확인한 후 왕흠약을 주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원대의 양가장 이야기는 매우 선명한 민족의식을 보이게 된다. 거란측의 음모는 야비한 것으로 그려지고 이에 맞서는 양씨 가문 무장들의 활동은 영웅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민족적 색채의 심화는 원대라는 시대 상황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이라 해석되고 있다. 한족 지식인들은 이민족인 원 왕조의 통치에 심정적으로 반발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손에 의해 창작되는 잡극 작품 속의 선명한 민족의식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원대를 거쳐 명대가 되면 양가장 이야기가 민간 속에 널리 유포되어 갔다. ‘들판과 모래밭, 그리고 산간으로 지형은 서로 다를지라도, 사람들은 모두 육장군(六將軍)을 좋아한다.’는 말이 그런 실태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육장군이란 물론 육랑, 즉 양연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양가장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각 지방마다 다른 줄거리의 이야기가 등장하였다.
그런데 명대에는 양가장과 관련한 문학이 분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궁정과 상층 귀족들은 희곡을 선호한 반면 민간에서는 소설이 점차 유행하기 시작했다. 궁정에서 희곡이 발달한 것은 홍무제가 <비파기>를 대단히 좋아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홍무제는 충효의 윤리를 강조하는 내용 때문에 <비파기>를 좋아하였다. 이러한 홍무제의 취향에 따라 명대 궁정에서는 희곡들이 자주 상연되었고, 그것은 모두 충효의 봉건 윤리를 강조하는 형식을 취했다. 양가장 이야기 또한 원대와는 달리 민족의식보다 충효사상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명대에 나온 양가장 관련 극본은 현재 2가지가 남아 있을 뿐이며 모두 궁정에서의 연출을 위한 것이다. 그 만큼 희곡은 제한된 범위에서만 공연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민간 속으로 파고들어간 소설은 다양한 발전을 보였다. 민간에 폭넓은 독자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명대를 통해, ‘상인이 소설과 잡서를 파고 다니는데, 사람들은 특히 광무제와 양문광을 좋아했다.’고 할 정도로, 양가장 관련 소설은 민간으로부터 대단히 사랑을 받았다. 이러한 소설을 통해 양가장 이야기가 거의 오늘날과 같은 줄거리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명대에 등장한 양가장 관련 소설은 상당수에 달하지만, 그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양가부세대충용연의지전(楊家府世代忠勇演義志傳)>과 <남북송지전(南北宋志傳)>의 2가지이다. 이 둘은 각각 <양가부연의(楊家府演義)> <양가장연의(楊家將演義)>라 불렸는데, 이후 양가장 이야기의 발전에 이정표와 같은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이전까지 구두 전설이나 희극, 소설 등 각종 장르로 발전되어온 양가장 이야기를 집대성하여 후세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특히 이 중에서도 <양가장연의>의 영향이 더 컸다. <양가장연의>는 당시의 저명한 문인 웅대목(熊大木)이 저술한 것으로서, 송태조의 거란 정벌에서 12과부가 서방을 향해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명대의 양가장 관련 소설 가운데 특징의 하나는 이른바 ‘양문여장(楊門女將)’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원대까지의 양가장 이야기는 철저히 남성 중심으로 꾸려졌고 그 가운데 여성은 보조자로 등장할 뿐이다. 그런데 명대의 장회소설(章回小說)에서는 후반으로 갈수록 여성의 비중이 커진다. 양씨 가문의 3대 장군 양종보가 산적의 소굴인 목각채(木閣寨)에 갔다가, 여두목인 목계영(穆桂英)을 만나 꼼짝 못하고 당하다가 사로잡혀서 그녀와 결혼하게 되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4대 장군 양문광도 마찬가지로 산적 두목인 두월영(杜月英) 및 두금고(竇錦姑)에 사로잡혀, 이들 두 여인과 차례로 결혼한다. 이야기의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여성 영웅들이 남성을 뒷전으로 밀치고 전장의 주역으로 활동한다.
다음 시대인 청대가 되면 양가장 이야기는 중국 사회 구석구석에 완전히 자리잡게 된다. 이 시기 양가장 이야기는 소설과 잡극, 기타의 민간 예능에서 다양하게 발전했다. 그와 관련한 문예 작품의 수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였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역시 경극과 지방극이었다. 청 중엽의 건륭 연간 이래 중국사회에서는 경극과 지방 희극이 크게 발전하였다. 여기에 양가장 고사가 흡수되어 공연되는 것이다. 양가장 이야기의 줄거리 자체는 기본적으로 명대에 나왔던 두 소설, 즉 <양가부연의>와 <양가장연의>에 근거하였지만, 일부 추가적인 확대와 발전이 생기기도 했다.
청대에 공연된 경극과 지방극 가운데 양가장 이야기와 관련한 극본의 종류는 대략 100여종을 상회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민중은 공연시간이 길지 않으면서 열정적이고 감동적인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한 대표적 작품이 바로 <금사탄(金沙灘)> <원문참자(轅門斬子)> <사랑탐모(四郞探母)> 등이었다. 이러한 경극 및 지방극의 유행과 함께, 양가장 이야기는 중국인에게 그 어느 고전 문학 작품보다 친숙한 것으로 자리잡아 갔던 것이다.
맺음말
양가장 이야기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양업이다. 그의 영웅적 활약과 비극적인 최후가 있었기에 양가장 이야기가 중국인에게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다. 양가장 이야기 속에서도 그는 양씨 가문의 전통을 닦은 사람이자 정신적 지주로 묘사되고 있다.
양업은 930년경 산시의 서북방에서 태어나 북한정권을 섬기다가, 979년 송에 의해 북한이 멸망한 이후 송의 장수가 되었다. 그는 북한정권에 몸담고 있을 때부터 눈부신 전공을 세워 ‘양무적(楊無敵)’이라 불렸다. 이런 명성을 듣고 있던 송의 태종은 그를 매우 파격적으로 우대하였다. 양업은 이런 태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속속 전공을 세우고 또 승진해 갔지만, 그 한편으로 그에 대해 시기하는 무리도 생겨났다. 979년 옹희(雍熙)의 북벌이 시도되어 실패로 종결되고 있을 때, 그는 신중한 전술 운용을 주장하다가 오히려 주변의 공박을 받아 원치 않는 전투에 나서게 된다. 이 전투에서 그는 장렬하게 희생되고 말았다.
양업의 사후 그 뒤를 이어 무장으로 이름을 떨치는 인물이 여섯째 아들인 양연소이다. 양연소는 양가장 이야기에서 양육랑(楊六郞)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는 옹희의 북벌 당시 부친 양업을 따라 나섰다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양업이 전사하는 마지막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허베이의 변방에서 무장으로 근무하며 거란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뒀다. 그는 부친 양업과 마찬가지로 부하 장병들에게 매우 자애로운 장수였다. 이러한 신망으로 인해 양업과 양연소의 부대는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양연소의 아들로 양씨 가문의 전통을 이어간 인물은 양문광이다. 양가장 이야기 속에서 그는 오히려 양업이나 양연소보다 훨씬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무장으로서의 실제 전공은 그들에게 많이 뒤진다. 그가 살아간 시대는 전연의 맹약이 체결된 이후였다. 따라서 그가 무장으로서 전투를 벌인 대상도 양업이나 양연소와 달리 거란이 아니었다. 그는 남북으로 반란 진압을 위해 활동한 것을 제외하면 주로 서하와 싸웠다.
송대 양씨 가문 무장들의 활동은 양문광을 끝으로 종료된다. 하지만 양가장 이야기는 이후로도, 3대 양종보와 4대 양문광을 거쳐 5대 양회옥(楊懷玉)으로 계속된다. 양가장 이야기에서 양문광은 2대 양연소의 손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역사 인물인 양문광의 실제 활동을 보이는 인물은 3대 양종보이다. 이처럼 양가장 이야기는 문학적 창작 과정에서 실제 인물의 행적을 많이 변형시키고 있다.
양가장 이야기는 이러한 양업ㆍ양연소ㆍ양문광의 행적을 소재로 하여 창작된 것이다. 양가장 이야기가 남송 이후 중국인들에게 확산되어 갔던 것은, 이민족의 압박을 받는 시기에 거란 및 서하를 격퇴하는 영웅의 활약을 통해 심리적 위로와 만족을 구한 결과라 여겨진다. 하지만 이밖에 양업과 양연소 등이 민중의 정서에 부합하는 비극적 영웅의 면모를 두루 갖추었다는 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양가장과 관련한 문학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남송시대였다. 구란의 민간 예능에서도 주요 공연 목록 가운데 하나로 양가장 이야기가 자리를 잡았다. 원대에는 서민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양가장 이야기가 잡극으로 상당히 자주 공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가장 이야기를 주제로 한 잡극도 제법 많이 창작되었다. 남송과 원대의 양가장 이야기는 비교적 선명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거란은 야비한 존재로 그려지고 이에 맞서는 양가장의 활동은 영웅적인 모습을 취했다.
원대를 거쳐 명대가 되면 양가장 이야기가 민간 속에 널리 유포되어 갔다. 명대 양가장 이야기의 발전을 주도한 장르는 소설이었다. 그 중에서도 <양가장연의>는 현재의 줄거리를 거의 완성한 작품으로서 후대의 양가장 이야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명대의 소설에서는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 발견된다. 이른바 양문여장이 등장하여 양가장의 주역으로 활동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양문여장의 비중은 증대된다.
전통왕조의 마지막 시기인 청대에 이르면 양가장 이야기는 중국사회의 구석구석에 완전히 정착된다. 이 시기 양가장 이야기는 다양한 장르에서 각각 특색 있게 발전했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역시 경극과 지방극이었다. 청 중엽의 건륭 연간 이래 중국사회에서는 경극과 지방 희극이 크게 발전하였다. 여기에 양가장 고사가 흡수되어 공연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양가장 이야기는 중국인에게 그 어느 고전 문학 작품보다 친숙한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사림(史林)> 38, 수선사학회,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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