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주(後周)의 세종(921∼959)이라 하면 어지간히 역사에 관심을 지닌 사람도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우선 후주라는 나라 이름조차 굉장히 낯설다.
후주의 세종에 대해 얘기하자면, 먼저 대당제국의 멸망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해야만 한다. 영화를 자랑하던 당도 8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서서히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유명한 안록산의 난(755∼763)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후 조정에서는 환관이 전횡하고 바깥으로는 절도사라는 무인이 발호하기 시작하였다. 당은 마침내 907년 주전충에 의해 멸망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50여년, 중국사에 마지막 대혼란기가 찾아온다. 바로 오대(五代), 혹은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 불리는 시기가 그것이다.
오대라 불리는 것은 중원의 정통왕조가 다섯, 즉 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기간 중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는 10개의 지방 정권(십국)이 난립하였다.
오대는 전통적 가치나 질서가 깡그리 무너진 시기였다. 무력만이 최고의 권위를 지닐 뿐 예의나 도덕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문인이나 학문이 설 자리도 없었다. 황제조차 문맹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오대의 두 번째 왕조인 후당 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황제 명종은 무인 군주로서 글을 알지 못했다. 사방에서 올라오는 상주문은 대신으로 하여금 읽게 하였는데, 대신 역시 글을 잘 몰라 보고하는 것이 대부분 본뜻에서 어긋났다.
오대는 무력이 횡행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혼란은 907년 당이 멸망하고 960년 송이 건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54년 동안 정통 왕조만 무려 5개가 교체되어 갔다. 이 시기 황제의 자리에 있던 인물은 모두 13명이다. 그 가운데 질병 등으로 자연사한 사람은 5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살해당하거나 전쟁 과정에서 전사하였으며, 혹은 강압에 못 이겨 신하에게 양위하였다.
바로 난세 그 자체였다. 이러한 오대 최고의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바로 후주의 세종이다. 그는 또한 사실상 오대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했다. 세종으로 말미암아 오대라는 난세의 종식이 가능했으며, 문치주의 국가 송도 그의 업적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2.
오대의 마지막 왕조 후주(951∼960)를 세운 인물은 태조 곽위(郭威, 904∼954)이다. 세종은 그 뒤를 이은 2대 황제로서 본명은 시영(柴榮)이었다. 태조 곽위를 이은 후임 황제의 이름이 시영이라…… 무언가 이상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곽위의 첫 번째 부인이 바로 시씨였고, 시영은 그 조카였다.
곽위와 시씨의 결혼에는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시영의 고모인 시씨는 후당(後唐, 923∼936)의 건립자인 장종(莊宗)의 후궁이었다. 그런데 장종이 반란으로 살해되고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명종은 대대적인 궁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명종은 환관과 후궁을 대폭 감축하였다. 장종의 후궁은 약 1,000명 정도였는데 그 중 100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귀가시켰다.
시씨 역시 귀가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 큰 비를 만나 며칠 간이나 여관에 숙박하여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루한 의복을 입은 젊은이 하나가 그녀 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행색이 초라한 그 젊은이의 목덜미에 참새 모양의 검은 점이 하나 있었다. 참새 모양의 점은 최고의 귀인이 될 징표였다.
시씨는 부모에게 전갈을 보내 그 젊은이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는 젊은이의 처지를 알아본 다음 반대했다. 그 젊은이가 바로 후일 후주를 창건하는 곽위였다. 곽위는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자랐다. 시씨를 만나던 당시는 군대에 투신하여 소부대의 장교로 근무하는 상태였다. 시씨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관에서 그대로 곽위와 결혼식을 치렀다. 지니고 있던 금전과 패물 가운데 절반은 고향의 부모에게 부치고, 나머지 절반을 갖고 신접 살림을 차렸다.
곽위와 시씨가 결혼하던 해 시영은 6살의 어린아이였다. 고모인 시씨는 시영을 끔찍이 사랑하였다. 그녀는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시영을 양자로 들였다.
시영은 어릴 적부터 말수가 적고 진중하였다. 이러한 성격으로 곽위와 시씨로부터 크게 귀여움을 받았다. 곽위는 시영의 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쏟았다. 그런데 고모이자 양모였던 시씨는 결혼한 지 10여년 만에 병사하였다. 이후 곽위는 몇 차례나 재혼을 했고, 아들도 둘이나 얻었다. 하지만 황제가 된 다음 후계자로 양아들인 시영을 지명하였다.
곽위는 결혼 이후 무장으로서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그가 순조롭게 승진해 가는 데는 부인 시씨의 내조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곽위가 모시던 실력자는 후일 후한(後漢, 947∼951)을 세우는 유지원(劉知遠)이었다. 곽위는 유지원 휘하에서 최고의 참모가 되었다가, 유지원의 사후 혼란을 틈타 후한을 멸망시키고 후주를 세웠다.
3.
시영, 즉 후주의 세종이 황제에 오른 것은 954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그는 황제가 되자마자 커다란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북방에 있던 북한(北漢)과 거란이 연합하여 대대적으로 남침해온 것이다. 북한은 십국의 하나로서, 곽위가 후한을 멸망시키고 후주를 세웠을 때 후한의 종실이 북쪽으로 도망가 세운 나라였다.
북한과 거란이 남침하자 후주의 조정은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북쪽의 방어선도 무너졌다는 전갈이 들려왔다. 후주의 관료나 무장 사이에는 거란에 대한 공포감이 대단하였다. 이러한 정황에서 갓 황제가 된 시영은 친히 원정에 나설 것을 결정하였다. 대신들은 무모한 처사라고 반대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종은 불세출의 전략가였다. 그는 원정에 나서 적의 의표를 찌르는 속도로 신속히 행군하였다. 거란과 북한의 군대는 세종의 군대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초반 전투의 승리에 고무되어 방비를 소홀히 하는 상태였다. 세종은 머뭇거리는 장수들을 독려하며 진두에서 부대를 지휘하였다. 후주의 군대는 방심한 북한과 거란의 군대를 급습하여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유명한 고평(高平)의 전투이다. 이때의 전투에서 조광윤(趙匡胤, 927∼976)이 황제 친위병의 무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조광윤은 960년 후주를 멸망시키고 송을 세우는 인물, 바로 송 태조이다.
북한과 거란의 남침을 분쇄하고 돌아온 세종은 한동안 내치에 전념하였다. 그는 관리의 기율을 엄정히 하고 황제권의 강화에 노력하였다. 만기친재(萬機親裁), 즉 모든 국사를 황제인 자신이 직접 챙기며 결재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이전의 오대 황제와는 판연히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오대 시기 만연했던 대민 수탈과 부정부패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가 가장 역점을 두어 추진하였던 사업은 중앙 친위군, 즉 금군(禁軍)의 강화였다. 이전까지 각지의 무장, 즉 절도사들은 독자적인 군대를 보유하여 중앙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세종은 지방의 군사 가운데 용맹한 자들을 모두 중앙으로 불러들여 금군에 소속시켰다. 금군의 병사로 노약자는 모두 내보냈다. 이렇게 군대를 개혁함으로써 지방의 절도사는 그 힘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이전까지 오대의 왕조는 모두 지방의 절도사가 세운 나라였다. 후주를 세운 곽위 역시 절도사 출신이었다. 하지만 세종의 개혁으로 말미암아, 이후 절도사는 중앙 금군에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후주의 뒤를 이어 송을 세우는 조광윤도 지방의 절도사가 아니었다. 세종에 의해 강력해진 금군의 총사령관이었다.
후주 세종의 정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의 하나가 불교에 대한 탄압, 즉 폐불(廢佛)이다. 중국 역사상 국가권력에 의한 대대적인 불교의 탄압이 네 차례 있었다. 이를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이라 부른다. 세 사람의 ‘무’자가 들어가는 황제와 한 사람의 ‘종’자가 들어가는 황제에 의해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일종(一宗)’이 바로 후주의 세종이다. ‘삼무’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두 황제(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 및 당대의 무종이다. 모두 후주 세종보다는 앞 시기의 인물들이다.
세종의 불교 탄압은 재정적인 필요성에서 추진된 것이다. 당시 불교 사원은 방대한 토지와 자산을 지니고 있었으며, 승려들은 조세 등 국가적 부담을 면제받고 있었다. 승려는 전체 인구의 2퍼센트에 달했다. 세종은 3만여 개의 사원을 폐지하고 2,700여개만 남겼다. 폐지된 사찰의 자산은 모두 국가가 몰수하였다. 압수한 불상도 녹여서 동전의 재료로 삼았다. 승려 및 대신들의 반대에 대해 그는,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시다. 인간을 위해 불상을 녹여 동전으로 만드는 것은 부처님의 뜻에 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때 몰수된 동상의 하나로 진주(鎭州, 오늘날의 허베이 성 정딩현) 대비사(大悲寺)의 대불이 있었다. 이 불상은 영험하기로 인근 각지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 때문에 누구도 감히 이 불상을 파괴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에 세종은 직접 이 사찰로 가서 도끼를 들고 두부와 흉부를 내리찍었다. 이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후일 세종은 거란에 대한 원정 도중 흉부에 악성 종양이 생겨 사망하였다. 사람들은 그 종양이 대비사의 대불을 파괴한 인과응보라고 말하였다.
내치를 다진 세종은 전중국의 통일을 위한 정복 전쟁에 나섰다. 십국의 지방 정권 가운데 가장 강력한 나라는 남방에 위치한 남당(南唐)이었다. 남당은 당의 후예를 자칭하며 북방 왕조와 대립하고 있었다. 세종은 956년 대군을 이끌고 친히 원정하여 남당을 굴복시키고 양쯔강 이북의 땅을 빼앗았다. 이후 남당은 급속히 국세가 약화되어 더 이상 후주에 맞서지 못하게 되었다.
이어 959년 3월에는 거란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통일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거란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시기 거란은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십륙주(燕雲十六州)를 영유하고 있었다. 세종은 연운십륙주의 중심지인 유주(幽州, 오늘날의 베이징)를 탈환하고자 하였다. 세종은 거란의 의표를 찌르며 신속히 진군해 갔다. 하지만 유주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급작스레 와병하고 말았다. 후주의 군대는 연운십륙주 가운데 두 개 주만을 탈환한 채 철수하고 말았다.
세종은 수도 카이펑으로 돌아온 직후인 959년 6월, 3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인물은 7세의 공제(恭帝)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6개월 후인 960년 정월, 금군의 총사령관인 조광윤이 후주를 멸망시키고 송을 세웠다.
4.
언젠가 세종은 역술에 밝다고 하는 관료 왕박(王朴)에게 자신의 수명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향후 30년까지는 무난히 수(壽)를 누리실 겁니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그는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대 말대로 된다면, 처음 10년 동안에는 통일을 이루고, 다음 10년 동안에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태평을 이루고 싶도다.”
하지만 그가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은 불과 5년 6개월이었다. 후일의 호사가들은, 왕박이 5와 6을 완곡하게 가르쳐 주기 위해 두 숫자를 곱하였던 것이라고 말하였다.
후주 세종의 등장과 함께 중국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진다. 오대는 당대 후반기부터 이어지는 혼란의 최고 정점이었다. 이러한 난세에 출현한 후주 세종은 여러 폐단을 쾌도난마와 같이 해결하며 새 시대를 위한 초석을 쌓았다. 송의 중국 통일 자체도 그의 군사적 공업을 계승한 것이었다. 나아가 송의 문치주의와 사회 발전도 실로 그의 치적에 힘입은 바 크다. 그가 있었기에 중국의 역사는 오대라는 암흑기로부터 송의 빛나는 번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미디어 삼성>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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