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송대사 연구 동향
머리말
근래 중국이나 일본 학자들과 만나게 되면, ‘한국 송대사 연구의 발달 상황이 놀랍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불과 몇 명의 연구자들에 의해 겨우 명맥만 유지될 뿐이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독자적인 학술지를 간행하며 중국·일본의 학계와 제법 활발히 교류하게 되었으니 그렇게 여길만도 하겠다. 하지만 그렇게 한국의 송대사 학계에 대해 경탄의 시선을 보내는 외국인 학자들조차, 한국내 송대사를 공부하는 전문 연구자가 30명에 육박하고 또 매년 발표되는 학술 논문의 숫자가 40편을 훌쩍 넘어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이만한 연구 인력과 역량을 지닌 나라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한국의 송대사 학계가 이렇게 장족의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연구 성과라든가 동향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언어의 장벽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중국사 연구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중국어·일본어·영어 등의 논문을 자유롭게 독서하며 그 연구성과를 섭취하여 자신의 연구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반면 해외의 연구자 가운데 한국어를 해득하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로 희소할 것이라 판단된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단절 내지 한국 학계에 대한 무지 때문에, 중국 및 일본의 연구자들 가운데는 한국의 송대사 연구에 대해 과도하게 환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전연 그 연구물을 접해보지도 못한 채 부당히 평가절하하는 사람도 있다.
본고는 해외의 연구자들에게 한국의 송대사 연구 동향을 소개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한국의 송대사 연구가 어떠한 발자취를 걸어왔는가, 그리고 현재의 동태는 어떠하며 그 내부에 존재하는 문제점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짚어볼 예정이다. 사실 ‘한국의 중국사 연구 동향’은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 소개된 바 있다. ≪中國史硏究動態≫만 해도 1990년대 이래 각분야 내지 시대별로 한국의 연구 동향을 비교적 소상히 소개해 오고 있다. 일어라든가 영어로 쓰여진 문장도 적지 않다. 본고가 서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송대사 연구 동향’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본고는 기존의 소개와는 달리 구체적인 연구물의 제목은 생략하고, 그 개략적인 동향에 대해 평이하게 언급해가려 한다.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의 중국사 연구 개황에 대해 간략히 짚어보고, 그 다음 송대사 연구의 동태를 얘기하기로 한다.
1. 중국사 연구의 연혁과 개황
한국에서 근대적 중국사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의 일이었다. 해방 직후의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도 사학자들은 역사 연구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그들의 움직임이 현재 한국내 최대의 역사학 단체인 歷史學會의 설립으로 이어졌다(1946년 12월). 당시 역사학자들의 대부분은 한국사 연구에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통치 시기, 일제의 어용학자들에 의해 한국 역사의 전통이 철저히 부정되고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식민통치의 편의를 위해 한국 문화를 비하함으로써 한국인의 정신 세계를 황폐화시켰다.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일제의 어용사학을 ‘식민사학’ 내지 ‘식민사관’이라 부른다. 해방 직후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식민사관의 청산과 극복이야말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인식은 중국사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사 연구자들의 수효도 적었지만 그들 모두, 한중관계사의 연구를 통해 식민사관의 그늘을 벗겨내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 어용사가들은 한국사가 독자성을 지니지 못한 채 몽고로부터 만주로 이어지는 외부 세계의 동향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른바 ‘滿鮮史觀’이 그것이다. 신생 대한민국의 중국사 연구자들은, 전통시대 한국과 중국 사이의 교류와 교섭을 연구함으로써 한국 역사의 주체성을 천명하는 데 학문적인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사 연구라 해도 한국사 이해의 방편으로 진행되는 단계에 머물렀던 셈이다. 이상과 같은 연구분위기는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金庠基·全海宗·高柄翊 등은 그러한 대외 교섭사 내지 교류사의 연구를 주도한 대표적 학자였다.
한국에서 한국사 이해의 방편이 아닌, 중국사의 내재적 발전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는 것은 1960년대를 경과하면서부터였다. 그것은 閔斗基라는 걸출한 연구자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 물론 민두기 이전에도 한중관계사가 아닌 중국사 연구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0년대말에 발표된 논문 가운데도 우수한 학문적 수준을 견지한 중국사 관련 논문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러한 중국사 논문들은 예외적 존재에 불과했으며, 당시 학계를 주도하던 학자들의 관심사는 단연코 한중관계사에 머물러 있었다. 민두기는 그러한 분위기에서 鹽鐵論, 占課田制 등에 관한 탁월한 논문들을 속속 발표해 갔다. 특히 1962年에 발표된 西晉의 점과전제 관련 논문은, 오늘날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占田과 課田의 성격 및 관계를, 일인학자 堀敏一 등에 비해 10여년 앞서 해명한 것이었다. 민두기의 학문적 관심은 시간이 흐르며 漢代로부터 위진남북조를 거쳐 명청시대, 나아가 근대사로 하강하기에 이른다. 그의 독창적인 시각의 제시와 정치한 분석은 명청시대의 신사층 및 戊戌變法, 國民革命 등의 연구에서 특히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훗날 그의 연구물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일어, 영어, 중국어 등으로 번역되기에 이르지만, 만일 그의 저작이 일찍부터 해외에 소개되었다면 한국의 중국사 연구에 대한 관심도 그 만큼 더 빨리 제고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중국사 연구에 대한 민두기의 기여는 후진의 양성이라는 측면에서도 결코 간과될 수 없다. 그는 1960년대말 이래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 재직하면서 약 100여명에 달하는 중국사 연구자들을 배출하였다. 현재 한국내 중국사 연구자의 수효는 400여명 가량에 이를 것이라 추산된다. 그의 훈도를 받은 연구자는 그 가운데 약 4분의 1에 달하는 것이다. 특히 그 범위를 대학의 교수로 국한시키면 그 영향은 더욱 배가된다. 중국사를 전공하는 한국의 대학교수는 약 150명 정도이며 그 가운데 과반수가 서울대에서 민두기로부터 지도를 받은 사람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현재 한국의 중국사 연구를 주도하고 있으며, 거의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의 일류 학자들과 비교하여도 결코 손색이 없는 연구성과를 배출해내고 있다.
민두기가 연구와 교육을 본격화하던 1960년대는 한국의 중국사학계가 실질적인 의미에서 태동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사의 한 갈래 정도의 위치에 있던 동양사학이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1965년 東洋史學會가 창립되고 이듬해부터 그 기관지인 ≪東洋史學硏究≫가 간행되기 시작했던 것이 그러한 움직임을 잘 보여준다. ≪동양사학연구≫는 최초 년 1회 출간되었으나 몇 차례의 증간을 거쳐 현재는 계간으로 간행되고 있다. 그러나 독립된 동양사 관련 학술단체가 설립되었다고 해도, 그 실상은 극히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학회의 명칭이 비록 ‘東洋史學會’란 이름을 붙이고 있었으되,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모두 중국사 전공자들이었고, 그나마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한중관계사에 관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창립 당시 동양사학회의 회원 전체 숫자도 20여명에 불과하였으며, 매년 발표되는 논문의 숫자도 10편 내외였다.
한국의 중국사 연구는 대략 1980년을 획기로 하여 다시 한 단계 도약하기에 이른다.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는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부는, 대학교의 입학 정원을 대폭 늘리는 조치를 내렸다. 그 배후에는 정권에 눈엣가시 같았던 학생운동 세력을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다분히 담겨져 있었다. 대학교의 정원을 늘리는 대신 학사관리를 엄격히 하겠다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학업에 충실하지 않는 학생운동 참여자들을 도태시키겠다는 심산이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1981년 이래 주요 대학의 정원은 약 두 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교수요원의 숫자도 대폭 늘어났다. 당시 각대학들은 늘어난 학생들로 인해 교수요원이 부족해지자 대학원 석사과정을 갓 이수한 사람까지 교수로 채용하기에 바빴다. 이처럼 교수 직위로의 진출이 용이해지자 대학들마다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중국사 분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오늘날 한국의 중국사 연구자 가운데 과반수에 육박하는 숫자가 1980년대를 전후하여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들이다.
1980년대 대학 정원의 확대와 이에 따른 교수요원 및 대학원 진학생의 증가는 이후 한국의 학문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단기적으로는 교수의 숫자가 대폭 증가하고 또 학문 후속 세대도 대거 확충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 못지 않게 역기능도 작지 않았다. 우선 제대로 트레이닝을 마치지 않은 채 대학교수로 취임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대학의 학문 수준이 저하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당시 양산된 학문 후속세대의 적체였다. 대학교수의 정원은 일시 대폭 증가하였지만 그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교수직위로의 진출은 어려워졌고, 이에 따라 양산된 대학원 졸업자들은 절반 쯤 실업자인 상태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중국사 연구자들에게도 이러한 정황은 그대로 적용되었다. 당시 배출된 중국사 연구자들은 오늘날 한국의 중국사 연구 저변을 형성하는 든든한 자원이지만, 또 한편으로 그들이 처한 어려운 생활여건은 중국사 연구에 종사하는 동료 내지 교수들로 하여금 커다란 부담과 미안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렇게 발전해온 한국의 중국사 연구는 오늘날 가위 괄목할만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전문적 학술 단체만 해도 1966年에 창립되어 한국내 모든 동양사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동양사학회 이외에, 동양사학회의 분과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사실상 독립된 조직과 기관지를 지닌 학회가 넷(중국고대사학회, 송요금원사연구회, 명청사학회, 중국근현대사학회)에 달한다. 1990년대에는 중국사 연구의 수도 편중을 반성하고 지방에서 조직된 中國史學會가 출범하기도 했다. 중국사학회의 경우 기관지인 ≪中國史硏究≫를 년 6회나 발행하고 있으며 연간 수 차례의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 밖에도 文史哲 연합 학술단체인 中國學會라든가 中國學硏究會 등까지 포함하면, 중국사 연구 관련 학회는 십여개에 달할 것이다. 이들 학술단체들은 모두 독자적으로 자못 활발한 학술 모임(월례발표회, 국제학술대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학계는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분립되어 있다. 이들 세 분야를 총괄하는 역사학의 종가격에 해당하는 학술단체가 전술한 바 있는 역사학회이며, 한국사 분야에는 韓國史硏究會와 韓國歷史硏究會 등이 있고, 이 밖에 동양사의 동양사학회와 서양사 분야의 西洋史學會가 있다.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매년 5월말 한국사·동양사·서양사 등의 모든 학술 단체가 참여하는 ‘역사학대회’를 개최한다. 이 학술대회는 역사학회의 주관으로 조직되는데, 이틀에 걸쳐 참여하는 인원이 대략 1,000여명을 상회한다. 한국의 역사학대회는 가위 역사학자들의 축제와 사교의 장이라 할만한 것으로서, 이때에는 역사학자들 이외에 수많은 서적상들까지 운집하여 자못 흥쾌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역사학대회에서는 동양사학회에 패널이 하나 할당되어 독립된 학술발표토론회가 개최된다.
역사학대회 이외에 동양사학회에서 주관하는 전국적 규모의 학술토론회로서, 10월말에 개최되는 동양사학회추계학술토론회와 1월말경에 개최되는 東洋史學會冬季硏討會가 있다. 추계학술토론회는 각분과별(고대사, 위진수당사, 송요금원사, 명청사, 근대사, 현대사, 일본사, 동남아사, 중앙아시아사 등)로 패널을 만들어 학술발표와 토론회를 진행한다. 추계학술토론회에는 대략 200명 내외의 연구자들이 참여한다. 전체 동양사학회 소속 연구자들의 절반 가량이 참여하는 셈이다. 동계학술연토회는 풍광이 수려한 곳을 선택하여 1박2일의 일정으로 개최되는데, 통상 100여명이 참석한다.
2. 송대사 연구의 전개와 現狀
한국의 중국사연구에 있어 가장 부진한 모습을 노정하고 있는 시기가 송대이다. 앞서 한국내 중국사 연구자의 수효가 약 400여명에 달하며 각대학에 재직중인 중국사 전공 교수도 150명 가량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들에 의해 작성되는 논문도 매년 400편을 넘어선다. 이에 비해 송대사를 전공하고 있는 연구자는 전체 30명 안팍이며 대학교수는 10여명에 불과하다. 범위를 요금원사까지 넓힌다 해도 이 숫자에서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 매년 발표되는 논문의 수도 40편 내외에 불과하다. 대략 한국의 송대사 내지 송요금원사 연구는 중국사학계에서 10분의 1의 비중을 점유하고 있는 셈이다. 전체 중국사에서 차지하는 송대사의 중요성이라든가 혹은 중국 내지 일본 학계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그 비중이 대단히 유감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내부의 인적구성을 살펴보면 그 문제점은 더욱 커진다. 한국의 중국사학계에는 선진진한사로부터 위진수당사, 명청사, 근대사,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학계를 선도하는 학자가 고루 분포되어 있고 이들의 명성은 해외 학계에도 상당히 알려져 있는 상태이다. 이에 반해 송대사의 경우에는 대다수의 연구자들이 40대의 연령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국내외에서 학계를 대표할 만한 사람도 없는 실정이다.
송대사 연구는 그 출발부터 여타 시대사에 비해 늦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송대사 관련 논문이 발표된 것은 1960년 전후의 무렵이었다. 이 무렵 몇 사람의 연구자가 등장하여 송대와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연구 활동은 일본학계의 연구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었고 그나마 그러한 연구조차 극히 단속적으로 발표될 뿐이었다.
1960년대에 활동한 연구자 가운데 주목되는 인물은 金庠基이다. 그는 소년시절 한학을 공부하고 장성하여 일본의 早稻田大學을 졸업한 다음 해방 직후부터 서울대 사학과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0년대까지 서울대학교 동양사연구실은 한국내에서 중국사 연구자료를 구비한 유일한 장소였다. 또한 당시 한국의 동양사를 선도하던 고병익·전해종 등도 모두 그의 간접적인 지도를 받았던 사람이다. 고병익이나 전해종은 모두 동경제국대학의 유학생이었지만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는 김상기로부터 엄정한 지도를 받았다. 해방 직후에 활동하였던 또다른 중국사연구자 金日出도 일본의 동북제국대학 출신이었다. 이러한 상황이었던 만큼 초창기 한국의 중국사연구는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것이 불가피했으나, 또 일본 유수의 대학에서 훈련을 받은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만큼, 그 연구수준은 상당한 정도에 도달해 있었다. 실제로 1960年 전후에 김상기가 발표했던 송대사 관련 논문들(고려와 宋 사이의 무역, 蘇轍의 古史 등)은 지금의 눈으로 돌아보아도 상당히 놀랍다 아니할 수 없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송대사 연구에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한다. 바로 申採湜과 高奭林이다. 두 사람 모두 1960년대 중반부터 연구활동을 시작하였지만, 그들이 본격적으로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것은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사실 이들 이전까지 한국 학계에는 송대사연구를 전문적으로 진행하는 연구자가 없는 狀態였다. 송대사 관련 연구가 간간이 발표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모두 한국사를 주로 연구하며 그 관심이 송대로 약간 연장되었다든가 혹은 어쩌다 한두 편 송대사 관련 논문을 발표했던 사람에 의해 수행된 것일 뿐이었다. 이에 반해 신채식과 고석림은 송대사 연구를 전공한다는 명확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을 뿐더러, 비교적 엄정한 자세를 지니고 연구를 진행하며 지속적으로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신채식의 주된 관심은 관료제, 그 중에서도 관원의 입사 및 승진 경로를 탐색하여 재구성하는 데 있었다. 특히 송대 蔭補制를 분석한 논문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당시 일본학계의 연구에 비해서도 상당히 앞선 수준을 보이는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高奭林의 연구분야는 사회경제사였다. 그는 1969년 隨田佃戶에 대한 논고를 처음 발표한 이래, 국가권력의 전호정책, 징세제, 戶等簿, 租佃契約法, 砧基簿, 實行簿 및 空行簿 등에 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내놓았다. 그의 연구는 일본학계의 동향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든가 혹은 새로운 사료의 발굴이란 면에서 미흡한 점이 많았다는 등의 아쉬움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의 논문에는 자료의 결핍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송대의 역사상을 탐색해가는 나름대로 치열한 사고와 상상력이 담겨져 있었다.
신채식과 고석림 이외에도 1970년대에는 太學을 연구한 卓用國, 송요금과 고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한 金渭顯, 葉適의 사상을 연구한 趙東元 등이 차례로 학계에 얼굴을 내밀었다. 1980년대가 되면 이들에 덧붙여 군사문제에 집중적인 관심을 견지하였던 安俊光, 남송초의 민중반란사 및 정치사를 연구하는 金容完, 북송의 正學으로부터 王安石을 거쳐 남송에 이르는 사상사의 동향을 정연히 재구성하고자 했던 李範鶴 등이 등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략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한국의 송대사연구는 조촐하게나마 내부의 논의가 가능한 상태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엽에 이르게 되면 연구자의 숫자가 비약적으로 증대된다. 1980년 소위 신군부가 집권하고 졸업정원제를 실시하면서 대학원 입학 붐이 조성된 효과가 이때에 이르러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등장한 연구자들은 줄잡아 20명에 육박한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재정사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을 쌓아가고 있는 金永濟, 사대부 사회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이에 덧붙여 학술사와 과거제 등을 포괄한 종합적 이해의 시각을 도출한 바 있는 梁鍾國, 華夷觀의 연구에서 출발하여 근래에는 교육사 및 여성사 분야로 관심 범위를 확대시키고 있는 朴志焄, 五代로부터 송대로 이어지는 사대부의 존재형태 및 그 변화에 대해 차분한 분석을 가하였던 金永眞, 사회경제사와 생태사∙문화사 등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兪垣濬, 송과 고려 관계사를 연구하는 姜吉仲, 葉適을 위시한 남송시대 사상가에 대한 연구에 주력하고 있는 曺在松, 進士科에 대한 정치한 연구를 수행한 바 있는 裵淑姬, 송대 재산 상속문제에서 주목할만한 의견을 제시하였던 陸貞任, 雇傭人이라는 비교적 특수한 주제에 대해 집중적인 조명을 가하고 있는 李錫炫, 치밀한 고증과 사료 검색을 바탕으로 외교 분야에서 차분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는 金成奎, 송대 茶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였던 徐銀美와 吳元敬, 唐代 민간신앙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하여 점차 송대로까지 연구관심을 확장시키고 있는 金相範, 국내외 송대사학계에서 최초로 官戶의 경제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바 있으며 근래에는 물가문제에 대한 분석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는 曺福鉉, 호구문제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였던 皇甫允植, 북송과 남송에 걸친 시기 서리 존재형태의 변화를 연구하였던 申泰光, 五代의 官制 및 文官 등의 문제에 대해 성실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金宗燮, 그리고 남송시대 福建의 경제 및 荒政에 대해 관심을 지니고 있는 李瑾明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공히 그 나이가 대략 45세 전후에 있는 연구자들로서 현재 한국의 송대사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분위기의 진작을 바탕으로 한국의 송대사학계는 1995年 마침내 ‘송요금원사연구회’라는 독자적인 학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초대 회장으로는 신채식이 추대되었으며 창립 당시의 회원은 40여명에 달했다. 송요금원사연구회는 송대사연구자 뿐만 아니라 요∙금∙원을 연구하는 학자까지 포함된 조직이지만 사실상 그 회원은 7할 이상이 송대사연구자로 구성되어 있다. 신채식의 후임으로는 김위현이 2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김용완이 3대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한국의 송요금원사연구회는 창립 이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매월 월례발표회를 운영해 오고 있으며 이 밖에 연간 한 차례 씩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통상 월례발표회에서는 2~3명의 연구자가 논문을 발표하고 이에 대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토론과 질의 응답을 전개한다. 하계방학 직전에 개최되는 학술대회에서는 7편 전후의 논문이 발표되고 이에 대해 지정토론자가 심도 있는 비평을 가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1997年에는 기관지인 ≪송요금원사연구≫를 발간하기 시작하였으며 2006년 12월까지 11호를 간행한 바 있다.
한국의 송요금원사연구회는 1998년 이래 중국학계와도 교류를 시작하였다. 송요금원사연구회의 성립 이전에도 한국의 송대사연구자들과 외국학자들 사이의 교류가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이래 대만과 일본,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대륙학계에서 개최된 송대사 내지 중국사 국제학술대회에 적지 않은 한국의 송대사연구자들이 참여한 바 있다. 예컨대 1988年 6月 대만의 중국문화대학에서 개최된 국제송대사연토회에는 신채식과 탁용국이 참석하여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1992년 5월 대만의 中央硏究院에서 개최된 국제주자학회의에는 철학사가인 尹絲淳이 참가하여 논문을 발표하였다. 1991년 북경대학에서 열린 한국의 동양사학회와 북경대학이 공동으로 주최하였던 국제학술대회에서는 신채식이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외에도 조재송∙김위현∙김영제 등이 대만∙대륙∙일본 등지에서 열린 몇 차례의 학술대회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모두 연구자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 것일 뿐이었다.
한국의 송대사 학계가 송요금원사연구회의 이름으로 국제학회에 참석한 것은, 1998년 중국의 寧夏省 銀川市에서 열렸던 중국송대사연구회 第8屆年會가 처음이었다. 중국송대사연구회 정기연회에의 참가는 이후로도 이어져, 2000년 하북성 保定의 第9屆年會에도 적지 않은 숫자의 한국측 학자가 참석하였으며, 마찬가지로 2002년 甘肅省 蘭州의 第10屆年會 및 2004년 사천에서 열린 第11屆年會, 2006년의 第12屆年會 등에도 한국학자의 참여는 계속되었다. 2003년 8월 항주에서 열린 ‘紀念岳飛誕辰900周年曁宋學國際學術硏討會’라든가 2004년 7월 河北省 承德에서 열린 ‘中國經濟發展史上的政府職能與作用國際硏討會’ 등과 같이 전문성을 지닌 대소의 국제학술대회에도 한국측 송대사연구자가 비교적 빈번히 참여하였다. 이러한 교류를 바탕으로 하여 2003년 11월에는 한국의 서울에서 비록 소규모이긴 하나 한국과 중국의 학자 20명 정도가 참여한 ‘한중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또 2005년 7월에는 중국의 하북대학 宋史硏究中心과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에서 공동 주최한 한중송요금원사학술연토회가 하북대학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 국제학술대회에는 한국측에서 14명의 연구자가 참여하였고 중국측에서는 47명이 참여하였다. 2007년 10월에는 마찬가지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와 하북대학 송사연구중심이 공동주최하는 한중간의 대규모 국제학술회의가 한국의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국제학회에는 중국측 학자 24명, 한국측 학자 16명이 참가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또 활발한 토론을 전개한 바 있다.
3. 한국 송대사 연구의 반성과 전망
조선시대의 學人들은 송대의 문치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던 만큼 송대의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명조가 만주족 왕조 청에 의해 복멸된 다음에는 유교적 斯文의 전통이 중국이 아닌 조선으로 넘어왔다고 자부하였다. 청의 연호 사용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崇禎紀年을 고집하였던 것도 그러한 표현의 일단이었다. 조선 학인들은 심지어 右文王朝였던 송조의 정사가 繁蕪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을 匡正하기 위해 ≪송대사≫에 대신할 새로운 역사서 ≪宋史筌≫을 편찬하기도 했다. ≪宋史筌≫은 유사한 목적 아래 편찬된 ≪宋史新編≫ 등에 비해 체제라든가 내용의 일관성 등에서 살필 때 분명 현저히 우수한 저작이었다. 또한 조선 학인들이 남기고 있는 史評 내지 논설들을 보면, 그들이 송조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정통하였는지 놀랍기 그지 없다. 일부 학자들은 송대의 역사에 대해 王夫之의 ≪宋論≫이나 趙翼의 ≪卄二史剳記≫에 버금갈 정도의 평론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특히 주자의 사상이나 행적에 대해서는 어느 학인들을 막론하고 실로 모르는 것이 없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와같은 전통은 아쉽게도 19세기 말 이후 일제를 위시한 외세의 침략 앞에 속절없이 단절되고 말았다. 그리고나서 전통과 단절된 근대적 방법론에 의거한 송대사 연구가 시작된 것은 길게 잡아도 196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한국의 송대사 연구가 출범하는 것은 1970년대 신채식과 고석림이 출현한 이후이다. 그로부터 현재까지 30여년, 한국의 송대사학계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 연구자만 30여명을 헤아리고 연간 발표되는 학술논문이 40편을 상회한다. 이러한 발전과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송대사학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적지 않다.
우선 첫째로 제기되어야 할 것이 연구물 사이의 수준차가 너무 심하다는 점이다. 사실 이는 한국학계만 안고 있는 문제점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중국과 일본, 대만 등에서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한국 학계에서 송대사 논문이 연간 40여편이나 발표된다 하였는데, 그 중에는 나름대로 뚜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자료를 검색한 결과물도 있는 반면, 연구논문이라 언급하기조차 민망한 글들 또한 적지 아니하다. 한국에는 學術振興財團이라는 연구지원기구가 있다. 이 기관은 전학문분야의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며 학술연구 분위기를 진작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 업무 가운데 이른바 학술지 평가사업이라는 게 있다. 한국내 모든 학술지를 평가하여 등급을 매기고, 우수잡지를 선별하여 ‘(학술진흥재단)등재지’라 명명한 후 지원하는 사업이다. 중국으로 친다면 核心集刊을 선정하는 사업과 유사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등재지에 발표된 논문 중에도 문제의식이 지리멸렬하며 읽어서 논지를 파악하기 힘든 것이 실리기도 한다. 한국 역시 중국 못지 아니한 ‘關係’의 사회이기 때문에, 서로 간 빤히 아는 마당에 논문 게재 여부를 심사하면서 ‘게재불가’ 판정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하여 주자의 말과 같이 ‘不知其理而妄作’하는 논문이 버젓이 일급잡지에 발표되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첫 번째의 문제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여러 여건 상 연구자들에게 다작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아직 교수 신분을 얻지 못한 사람은 교수가 되기 위해, 그리고 이미 교수가 된 사람일지라도 우수한 업적평가를 받기 위해, 일급잡지에 가능한 한 많은 숫자의 논문을 게재해야만 한다. 얼마나 우수한 논문을 작성하였느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몇 편을 어디에 실었는가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 필자가 대학원에 재학하던 시절 민두기 교수가, ‘아무리 성실하게 공부한다 해도 책임 있는 논문이라면 2년에 한 편 작성하기도 어렵다.’고 말하던 것을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민두기 교수의 말처럼 2년에 1편의 논문을 쓰고 있다가는 교수 자리를 부지하기도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 필자만 해도 연간 적을 때는 2편, 많을 때는 서너 편을 발표하기도 한다. 더욱이 근래 한국의 학술잡지들도 논문의 분량을 제약하기 시작하고 있다. 과거 10여년 전만 해도 일급 학술잡지일수록 분량이 많은 논문을 선호하였다. 문제의식을 충분히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200자 원고지 150매(대략 중국어 20,000자 정도)를 넘기면 원고 접수 단계에서부터 난색을 표한다. 그러니 가벼운 문제의식의 논문을 가볍게 써내려가는 것이 능력으로 인정받기까지 하는 것이다.
세 번 째로 연구자 숫자도 많지 않지만 그나마 각 연구자들의 시각이 분산되어 있어 한국 학계를 아우를 수 있는 방향성이나 문제의식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러한 공통된 문제의식의 부재라는 현상은 비단 한국학계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2, 30여년 전부터 지적되어온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사정은 한국과 다르다. 송대사 연구자가 무려 500여명에 달하며 연간 150여편의 논문이 발표되는 중국은 논외로 치더라도, 일본학계의 상황은 거의 1세기여에 가까운 연구사의 무게, 그리고 과거 주요 논쟁이 있을 때마다 경험하였던 시대구분상의 입장차이라는 태생적 장애 등에서 기인한다. 물론 일본 송대사학계가 겪고 있는 전반적인 침체 상황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기는 하다. 하지만 한국의 학계는 이제 송대사연구가 막 본격화하는 시점에 접어들었고, 그런 만큼 연구자들 사이 문제의식의 공유와 토의 등을 통해 송대사 연구를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네 번 째로는 본질적인 문제로서 송대사를 연구하고자 하는 젊은 연구자들의 충원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의 송요금원사연구회에 참석하면 거의 대부분 40대의 중년 학자들이다. 30대나 20대의 젊은이는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상은 10여년래 한국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人文學의 危機’와 긴밀히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인문학, 즉 문사철을 연구해서는 대학교의 교수가 되지 못하는 한 밥벌이가 불가능한 것이다. 또 한국에서 교수가 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이런 만큼 1980년대 대학원 입학 붐이 지나가고 그때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들이 웬만큼 대학 교수 자리들을 차지하고 나자, 더 이상 새로운 교수 자리가 생겨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실정에서 어린 제자들에게 역사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하기 어렵게 된 것이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송대사학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송대사연구가 과도하리 만큼 중국과 일본 학계의 연구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한국의 송대사 연구자들 스스로도 한국 학계보다는 중국이나 일본의 학계를 의식하고 그들과 경쟁하며 논문을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국학계의 영향과 자극이야말로 단기간에 한국 학계의 수준을 끌어올리게 하였던 동력이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한국의 송대사연구, 나아가 중국사 연구가 이념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달라야 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학계가 독자적인 시각과 위상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 국제적인 송대사 연구에 기여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맺음말
지금까지 한국의 송대사 연구에 대해 연구자의 소개를 중심으로 간략히 개괄하였다. 물론 여기에 언급된 인물과 그 연구가 한국 송대사 학계의 전모는 아니다. 이 외에도 송대사관련 논문을 발표한 사람들은 적지 않다. 특히 철학 분야의 연구자들은 거의 모두 누락된 상태이다. 여기에 소개된 연구자들에 대해서조차 그 관심 범위나 연구 실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못했다.
한국의 송대사 관련 연구물은 논문만 헤아려도 이미 1,000편을 넘겼을 것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그 수준은 일단 논외로 하고 단순히 수량만 따진다면 연구성과의 축적은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일부 연구자들의 경우에는 비록 그 수는 많지 않으나, 중국이나 일본, 구미의 학자들과 충분히 비견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본문에서 돌아본 바와 같이 한국의 송대사학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너무도 많다. 국제 학계와의 교류가 활발하지 못하여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안이한 사유에 젖어 있다는 점이야말로 그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내 중요 연구자들은 중국 및 일본의 연구에 대해서만 관심을 지니고 그것에 눈길을 돌린 채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따라서 안이한 연구자들은, ‘내 論文을 누가 읽으랴’ 라고 생각하며 태연히 아무런 의미 없는 논문을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 비추어 근간 한국의 송대사학계가 중국 및 일본, 대만 등과 활발히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바람직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실 한국은 漢學 연구의 전통이라든가 지리적 위치 등의 점에서 중국사 연구에 매우 유리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 최근의 경제 성장으로 말미암아 학문 연구에 대한 관심이나 지원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도 한국의 중국사 연구 내지 송대사연구에 경쟁력을 더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이에 덧붙여 해외 학계로부터의 자극과 관심이 덧붙여진다면, 한국의 송대사학계가 현재의 상황에서 한 단계 비약하여, 송대사 연구 자체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아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宋史硏究通迅≫ 2007년 1기, 총49기에 <韓國的宋史硏究動向>이란 제목으로 게재, 이후 ≪역사문화연구≫ 29, 2008년 2월에 번역하여 다시 게재)
'중국역사 읽을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난국 속에서 이룬 작은 안정 : 남송의 효종과 그 치적 (0) | 2025.08.24 |
|---|---|
| 악비와 진회 (0) | 2025.02.26 |
| 중국 전근대의 후궁과 후궁제도 (0) | 2025.02.15 |
| 중국 여성의 슬픔 - 전족의 역사 (0) | 2025.02.15 |
| 남송의 멸망과 양양 번성의 전투 (0) | 2025.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