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중국의 후궁과 후궁제도
후궁이란 황제가 가정생활을 하는 공간, 즉 황제 개인의 저택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황제와 그를 둘러싼 수많은 여인들이 생활하였다. 위로는 황후로부터 비빈(妃嬪) 및 최말단의 궁녀에 이르기까지, 그 여성들의 숫자는 통상 수천 명에 이르렀다. 아주 적을 때에도 수백 명에 달하였으며 많을 경우는 수만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후궁이란 말은 통상 이러한 거주공간이란 의미 이외에 그곳에 존재하는 여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쓰이기도 한다.
후궁에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남성도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여인들의 일상생활 유지를 위해 필요한 노동이라든가 잡무는 누가 담당하였을까? 그것은 그냥 여인들 자신에 의해 처리되거나 혹은 거세된 남성, 환관에게 맡겨졌다. 후궁은 철저히 황제라는 남성 개인을 위한 공간이었고, 따라서 후궁은 그 자체 황제의 성생활과 긴밀한 연관이 있었다. 후궁에 그토록 많은 여인들을 집주시켰던 것도 두 말할 나위 없이 황제의 성생활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황제의 정처(正妻), 즉 황후는 후궁을 주재하는 인물이다. 황후란 명칭은 진시황 시기 ‘황제’란 칭호가 제정되면서 도입되었다. 후궁내에 거주하는 모든 여성들, 즉 비빈궁녀(妃嬪宮女)와 여관(女官)은 황후에게 통속되어 있었다. 황후는 후궁의 주재자로서 법령과 형벌을 집행하며 내부의 신분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황후는 후궁내에 있어 황제권력 그 자체였다. 황후의 역할은 비단 후궁내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천하의 어머니’로서, 황제권력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 황제의 모친인 황태후가 전면에 나서 황제권력을 대체하기도 했다. 황제가 어리거나 무능할 때, 혹은 어떠한 이유에서이건 황제가 존재하지 않을 때가 그러한 시기이다. 이러한 황태후의 황제권 대행을 임조칭제(臨朝稱制)라 부른다. 이들의 집권은 작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에 미치기도 했다. 특히 황제가 부재(不在)할 때 황태후는 후임 황제의 선임에 결정적인 권위를 행사하기도 했다.
황후와 비빈(妃嬪)의 관계는 양면적인 것이었다. 황후가 후궁내 황제권을 대행하는 존재로서 내외명부(內外命婦)의 입조를 받을 경우, 황후와 비빈 사이는 군신관계가 된다. 하지만 동시에 양자는 황제의 부인군에 속하는 처첩(妻妾)이기도 하다. 따라서 비빈은 평상시 황후를 대할 때 처첩(妻妾)의 예를 행하였으며, 다만 후궁내 조회(朝會)가 행해질 때에만 군신(君臣)의 예를 갖추었다.
후궁에는 통상 수천 명 내지 수만 명의 여인들이 존재하였다. 이렇게 수많은 여인들이 거주하다 보니 그 내부 여러 문제들이 파생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한 기구의 설치가 부득이했고, 후궁에는 남성이 부재하는 까닭에 이들 직위에도 당연히 여성, 즉 비빈궁녀(妃嬪宮女)들이 임명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후궁내의 관직을 여관(女官)이라 총칭하는 바, 그것은 조정의 관료조직을 본뜨고 있었다.
후궁의 여인들은 명목상 황제의 부인들이고, 이들은 황제의 잠자리 시중(侍寢)을 위해 존재한다. 비빈궁녀들이 황제의 선택을 받아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소행(召幸)․ 행행(行幸)․ 승행(承幸)이라 불렀다. 모두 황제의 은총(幸)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황제의 선택은 통상 무작위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황제의 소행(召幸)은 엄중한 경호를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전통시대 황제들은 얼마나 빈번히 비빈궁녀에 대한 승행(承幸)을 행하였을까? 승행의 기록은 엄중한 베일에 가려 취급되고 파기되었기 때문에 그 구체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남송시대 탁종(度宗)의 사례는 그 실상이 어떠하였는지를 여실히 전해준다. 당시 황제의 승행을 받은 여인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튿날 아침 담당 부서에 나아가 승행의 사실을 고하여야 했다. 그러면 환관이 승행의 장소와 시간을 기록하여 관리하였는데, 통상 매일 아침 승행을 확인받으러 오는 비빈의 숫자가 세 명에서 다섯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통시대 황제들의 무질서한 생활은 실로 황음(荒淫)이라 하여 지나침이 없었던 것이다.
비빈궁녀들의 주된 내원(來源)은 민간으로부터의 선발이다. 이를 선미(選美)라 부른다. 미인을 가려 뽑았다는 의미이다. 선미의 대상은 만 15세 전후의 소녀들이었다. 이렇게 선발된 소녀들이 후궁에 들어가 최말단인 궁녀가 된다. 선미는 면밀한 과정을 통해 시행되었다. 후궁의 여관들은 선미 대상 소녀들의 신체를 상세히 조사하게 되어 있었다. 여관(女官)들은 먼저 그들의 전신과 두발을 개략적으로 검사한 후 이어 나체 상태의 정밀검사까지 행하였다.
선미의 과정을 거친 나이 어린 소녀들은 후궁 안의 공간에 갇혀 갖가지 허드렛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면서 황제의 기약 없는 승행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후궁내에는 엄청난 숫자의 여인들이 존재하는 까닭에 특별한 행운이 없는 한 승행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궁녀들은 구중궁궐에서 비참한 생활을 보냈다. 후궁은, ‘한 번 들어가면 깊은 바다와 같다’(宮門一入深似海) 고 일컬어지는, 실로 적막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궁녀들은 매일매일 잔심부름을 하며 조잡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살아갔다. 처량하기 이를 데 없는 환경에서 슬픈 청춘을 보내는 것이다. 따라서 궁정의 선미는 여성과 그 가족들에게 재난과 같은 것이었다. 때로 선미의 계획이 알려질 경우 도하의 민심이 흉흉해지기도 했으며, 선미를 회피하기 위해 온갖 방도가 강구되기도 했다. 선미를 앞두고 어린 소년 소녀들이 일시에 결혼을 서두르는 통에 미혼의 소녀가 사라졌다고 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후궁 여인들의 신분상승은 철저히 황제의 승행 여부와 그 빈도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런데 후궁의 비빈궁녀들은 모두 엄밀한 선발과정을 거친 여인들이다. 그러한 만큼 그 누구나 특출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황제의 총애는 극히 우연한 계기를 통해 다가왔다가 또 그 만큼이나 덧없이 사라졌다. 더욱이 황제의 두터운 총애를 받는다 해도 청춘의 시절은 흐르고, 나이 들어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상실하면 황제의 관심은 가차없이 새로운 여성에게 향했다. 이러할 때에도 후궁의 여인이 여전히 위세를 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다. 다름 아닌 황제의 아들, 즉 황자를 출산하는 경우이다. 특히 그 황자가 황제의 장자이거나 혹은 훗날 후임 황제로 등극하는 경우, 그 모친인 비빈의 신분은 종신토록 보장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비빈궁녀 개인의 신분은 그대로 그녀의 출신가문에 반영되었다. 해당 가문에게 선미는 의심할 나위 없이 재앙이지만, 요행 궁녀로 들어가 황제의 승행을 받아 비빈의 지위로 상승하게 되면, 그 즉시 그 가문에게는 영화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후궁의 생활이란 황제의 발길을 끝없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황제로부터의 승행과 관심이야말로 후궁 여인들에게 있어 그 고통스런 생활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여인들은 그러한 기회를 기다리다 속절없이 청춘을 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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